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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의 마지막 문장은 2

by 여울 Jan 31. 2025


앤 시리즈 1권, Anne of Green Gables의 마지막 문장은 앤이 부드럽게 읊조렸지만 사실은 앤의 고유한 문장은 아니다.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whispered Anne softly.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세상 모든 것은 평화롭도다."라는 이 문장은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시의 한 구절이다. 저자 몽고메리는 책의 곳곳에 본인이 좋아하는 책의 구절이나 싯구를 인용해 놓았다. 어떤 경우에는 저자나 제목을 확실하게 말해 주지만 때로는 그냥 자연스럽게 녹여내어서 현대의 외국인 독자로서는 간혹 헷갈린다. 문학소녀 앤이 시적으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시를 인용해서 말한 것인지 아니면 위트있게 변형해서 말한 것인지 말이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19세기 영국 시인으로 부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6살 연상!)과의 로맨틱하고 열정적인 연애와 도피 결혼으로도 유명한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도 너무 좋은데 여기서는 중요한 것은 아니니 나중에 따로 기회가 되면 다루어 보고 싶다. 아무튼 이 로버트 브라우닝은 '피파가 지나간다 Pippa Passes'라는 긴 시를 썼다. 극시(verse drama)라고도 하는데 실제 연극 상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낭송을 위한 극적인 내용을 담은 시이고 정말 긴 시라서 솔직히 내가 아는 것은 줄거리와 앞 부분, 그리고 마지막 부분 정도이다. 


앤이 낭송한 이 부분은 제일 앞 부분, 피파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첫 시의 끝부분이다. 

The year’s at the spring, 시절은 봄이고, 

And day’s at the morn; 때는 아침이며

Morning’s at seven; 시간은 7시.

The hill-side’s dew-pearl'd; 언덕의 이슬은 진주빛이며

The lark’s on the wing; 종달새는 날개짓하고

The snail’s on the thorn; 달팽이는 가시 위를 오른다

God’s in His heaven-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All’s right with the world!  세상은 모두 평화롭도다!


이탈리아 소녀 피파는 1년 365일 중 딱 하루를 쉬는데 바로 이 날이다. 피파는 단 하루 뿐인 휴가를 희망에 찬 마음으로 맞이하며 노래한다. 이 시는 아침, 점심, 저녁, 밤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고 피파가 노래가 펼쳐지는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네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악과 불의가 일어나려는 현장에서 피파의 노래는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정작 피파는 모른다. 자신의 노래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이다. 


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을 헛되게 보내었다고 슬퍼하며 마무리한다. 

All services ranks the same with God - 

With God, whose puppets, best and worst

Are we: there is no last nor first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다 동일하게 매겨지나니

신 앞에서 최선이든 최악이든 그저 도구일 뿐인

우리는 제일 마지막도 제일 처음도 없도다


이렇게 시의 내용을 알고 나니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그리고 조금 더 다르게 보였다. 이미 앤은 그 짧은 생애 동안 너무나 많은 희로애락, 특히 슬픔의 애를 많이 겪으며 지나왔다. 삶을 살다 보면 이런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는 것이 진짜 많고 왜 하필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 괴로울 때도 많다. 비참함과 부끄러움은 당연하게 따라온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과정들이 있기에 오히려 더 삶이 깊어지고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나온 그 시간들이 의미가 없는가 하면 있다고 대답한다. 겪고 싶진 않지만 겪었기에 시선이 달라졌노라고 그렇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피파의 저 이야기가 단순하게 희망을 노래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견딘 앤이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고요히 응시한다고. 하지만 그 후 앤의 삶을 보면 당연하게도 고통과 아픔과 부끄러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앤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펼쳐진다. 그러니 어쩌면 몽고메리는 이 피파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암시를 살짝 풀어놓고 싶었던 것을 아닐까.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책의 맨 앞장으로 돌아간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 아름다운 시의 한 부분이 적혀있다. 역시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이다. 


The good stars met in your horoscope,

Made you of spirit and fire and dew.


선한 별들이 너의 별자리에서 만나

영혼과 불과 이슬로 너를 빚어내었다


이블린 호프(Evelyn Hope)의 한 구절이다. 꼭 앤을 노래한 것 같다. 불과 이슬과 그리고 영혼으로 이루어진 앤은 이렇게 세상을 겪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지나간다. 이제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일 년에 단 하루를 쉬는 피파보다 훨씬 나은 휴가를 보냈는데도 역시 끝나는 것은 아쉽다. 아쉬워하는 마음이 같은 만큼 또 나도 모르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를. 그런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기를. 음력 설을 마치는 또 다른 바람으로 음력 새해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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