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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의 마지막 문장은 1

by 여울 Jan 31. 2025

원제인 초록지붕의 앤 (Anne of Green Gables)보다 한국인에게 더 익숙한 이름은 빨강머리 앤이다. 아마 앤이 들었으면 정말 싫어했을 법하다. 본인의 머리 색을 빨강, red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auburn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으니 말이다. auburn은 reddish-brown, 혹은 red-brown이라고 불리는 색이다. 번역하면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즉 적갈색이니 그냥 빨강색과 엄청난 차이가 있지는 않지만 앤 셜리 본인은 그렇게 불리고 싶어한다. 앤의 동급생 길버트는 앤의 관심을 끌고 싶어 앤의 머리 끝을 붙잡고 "Carrots! Carrots!"라고 말했다가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말았으니 앤의 머리색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어찌되었건 책 제목을 빨강머리 앤으로 한 것이 원제 초록지붕의 앤 보다 훨씬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초록지붕의 앤이라고 하면 그게 누구야?하는 분들은 있어도 빨강머리 앤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책이나 만화를 안 보셨어도 그 친숙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모습을 한 번은 보셨을 테니까 말이다. 그 앤이 사실은 열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들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앤 시리즈 열 권의 제목을 보면 이야기의 중심이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1권은 Anne of Green Gables, 2권은 Anne of Avonlea, 3권은 Anne of the Island, 4권은 Anne of Windy Poplars, 5권은 Anne's House of Dreams, 그리고 6권은 Anne of Ingleside이다. 그러니까 책 제목 앞에 Anne이 분명하게 들어감으로서 앤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만 배경이 조금씩 확대된다. 초록지붕이라는 집이라는 공간이 2권에서는 애번리라는 마을로 확장이 되고 3권에서는 대학을 가게 되면서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더 넓혀진다. 4권의 윈디 포플러 혹은 윈디 윌로우는 앤이 직장 생활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지내던 집의 이름이고 5권에서 드디어 자신의 꿈의 집을 갖게 된다. 잉글사이드는 처음 살던 신혼 집을 떠나서 학군지(?)로 이사간 집의 이름이다. 


6권부터는 앤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앤의 아이들 이야기가 주요하게 다뤄지고 7권과 8권으로 가면서는 앤의 자녀들이 성장하고 그 중에서도 막내딸 릴라의 성장기로 무게가 옮겨간다. 9권과 10권은 앤의 이웃들의 이야기가 단편집처럼 실려있는데 몽환적이기도 하고 신비주의적인 느낌의 이야기들도 많다. 앤의 이야기들과는 분위기가 굉장히 달라서 재미는 있는데 애매하다. 시리즈를 읽다 보면 그저 고아 소녀의 파란만장한 적응기를 넘어서서 당시 캐나다 한쪽 지방의 문화나 분위기를 보는 것, 그리고 나중에는 세계 제1차 대전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어 놓는가까지 엿볼 있다. 


앤이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게 되면서부터 (무려 7명!!) 앤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여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의 반영인가 싶어서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6권부터 8권도 정말 재미있지만 나로서는 1권에서부터 3권까지, 앤의 성장기를 다룬 책들을 더 열심히 읽곤 했었다. 그 중에서도 주옥같은 명대사가 한 가득 들어 있는 1권은 역시 몇 백 번을 읽어도 좋은 것 같다. 좋은 말이 하도 많아서 보고 또 보는데 가장 여운을 주는 것은 제일 마지막 장(chapter 26. The Bend in the Road)의 마지막 장면(scene)인 것 같다. 


퀸 학원에서 에이버리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앤은 그러나 그 영광의 길을 버린다. 장학금을 포기하고 마릴라와 함께 지내기로 한 것이다. 책이니까 쉽게 넘어가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정말 어려운 결정이다. 내가 4년제 대학 장학금을 포기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을 위해서 직장을 다니기로 한 것이니 말이다. 그랬으면 정말 두고두고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앤은 기쁜 마음으로 접는다. 그리고 그 앤을 위해서 길버트는 자신이 다니기로 되어 있던 애번리 초등학교의 교사 자리를 양보하고. 


30분이나 서서 이야기 할 정도로 길버트와 앤이 좋은 친구인지 몰랐다는 마릴라의 놀리는 말에 앤은 대답한다. “We haven’t been—we’ve been good enemies. But we have decided that it will be much more sensible to be good friends in the future." 친구는 아니었고 훌륭한 적이었다고. 하지만 미래에서는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훨씬 분별있다고 결심했노라고. 


그 날 밤 앤은 행복한 마음으로 창가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다. 벚꽃나무 가지는 바람에 부드럽게 사부작거리고 민트 향기가 풍겨온다. 별들은 반짝이고 절친 다이애나의 방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Anne sat long at her window that night companioned by a glad content. The wind purred softly in the cherry boughs, and the mint breaths came up to her. The stars twinkled over the pointed firs in the hollow and Diana’s light gleamed through the old gap.


퀸즈에서 돌아온 날 밤 앤의 지평선은 좁혀졌다. 하지만 앤은 그녀의 발길 앞에 놓인 길이 협소해졌다고 할지라도 고요한 행복의 꽃들이 그 길을 따라 피어있음을 알고 있었다. 

Anne’s horizons had closed in since the night she had sat there after coming home from Queen’s; but if the path set before her feet was to be narrow she knew that flowers of quiet happiness would bloom along it. 


진심가득한 일이 주는 기쁨과 가치있는 열망과 유쾌한 우정이 그녀의 것이었따.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이상적인 꿈꾸는 세계와 타고난 환상을 강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길에는 모퉁이가 있었다!

The joy of sincere work and worthy aspiration and congenial friendship were to be hers; nothing could rob her of her birthright of fancy or her ideal world of dreams. And there was always the bend in the road!


앤이 말하는 이 the bend in the road는 구부러진 길 모퉁이로 종종 번역이 되곤 한다. '구부러진'이라는 이 어감이 나는 조금 아쉬웠다. 그냥 길모퉁이라고만 해도 되지만 왜 번역자가 굳이 '구부러진'을 넣엏는지는 이해가 된다. 커브길이라고 하는 구불구불한 저 능선을 따라가는데 길 끝까지 가서 꺾지 전까지는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나라 도로에서 늘 거울을 달아놓고 주의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저 길 끝자락에는 예상치 못했던 슬픔이 있기도 더한 아픔이 있기도 하지만 혹은 예기치 않은 기쁨과 즐거운 놀람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앤 시리즈 1권은 정말로 그 모퉁이 모퉁이마다 앤이 보여준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앤은 조용히 다음의 이 한 문장을 속삭인다.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whispered Anne softly.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세상 모든 것은 평화롭도다."라는 이 문장이 나는 어디에서 온 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이 책을 마무리하기에 참으로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순간에, 느낄 때가 있다. 이 힘든 여정이, 가능하면 겪고 싶지 않은 고난의 과정이 결국은 내 삶이고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라고 말이다. 아. 그런데 처음엔 몰랐다. 이 문장이 어디에서 나왔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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