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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테르 Apr 17. 2024

나만의 경험을 글감으로 모으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나의 기억이며 경험이다. 개인들의 일상적인 선택과 행동 그리고 개인적 경험과 관점은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고 개인과 역사는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한다. 내가 지난 온 경험들도 내 글의 글감이 될까     


<1987년> 영화를 보았다. 몇 년 전 상영된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하정우 배우가 나온다.

그러나 1987년을 지나온 나이기에 과연 이 영화에 어떻게 그날이 묘사되었을지 궁금했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아 맞아 저 때 그랬지’ 하며 고증을 하듯 지켜보는 내가 역사 속 한 사람이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역사책 속의 인물 중 하나처럼. 스무 살의 그때로 내 감정이 이입되었다.   

   

와아아아.   펑퍼퍼버버벅!  

희뿌연 연기가 퍼지자 숨이 막히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수업 후 집에 가던 내 발 밑으로 굴러와 터진 동그란 모양의 체류탄 - 사과 모양 같다고 해서 일명 사과 탄이라 불리던 - 터졌다. 정문 앞에 몇 시간째 진을 치고 있던 방패를 든 전경들이 우르르 정문을 향해 달려오자 일사 분란하던 학생들 물결이 “독재 타도” 구호를 더 크게 외치며 성난 듯 우르르 내려갔다. 다른 한편에선 갓 새내기 신입생들과 집으로 가던 여학생들 한 무리가 소리를 지르며 갈팡질팡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얘들아!! 어서 피해. 자 이쪽으로”. 누군가가 우리를 잡고 안내하자 우리 새내기 신입생 너 댓 명은 학교 정문 옆 체육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말할 수 없는 통증으로 눈이 따끔거리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든 물로 씻으면 사라지지 않을까 싶어 계속 세수를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눈은 맵고 아팠다. -후에 체류탄 성분은 물에 닿을수록 통증이 더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 이게 누구지 눈을 떠 거울을 보니 눈 주변은 퉁퉁 붓고 얼굴 전체가 전부 붉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침에 꽃단장하고 등교했던 나는 온 데 간데 사라져 버렸다. 1987년 4월 화창한 봄날 오후, 도대체 이 상황은 뭔지? 왜 난 이유도 모르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1987년 3월 대학을 입학한 새내기 신입생이던 난 이 모든 것이 궁금했다. 내가 목표했던 대학도, 전공도 아니었지만 상황이 비슷한 몇몇 친구들을 만나 정을 붙이며 그럭저럭 다니고 있던 그때. 4월 그날의 하루는 잊지 못할 충격 그 자체였다. 그 후 수업은 늘 휴강이 되었고 시험은 항상 리포트로 대체되었다. 100장가량의 리포트를 손으로 쓰다 보면 손가락에서 쥐가 나는 듯했고 내가 무슨 내용을 쓰고 있는지도 헤맬 때가 종종 있었다. 학교 정문과 학생 회관엔 큰 대자보가 운동장엔 선단에 오른 학생회장은 모인 학생들을 향해 격분한 듯 큰 소리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술렁이는 대학가, 수업 없는 강의실, 진리의 상아탑의 상징이던 대학은 변화하고 있었다. 나는 왜 학교를 다닐까? 왜 이리 어수선하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역사학도라는 것이 민망할 만큼 난 모든 상황에 철저히 주변인이자 관찰자인 듯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고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시작되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알고 싶었다. 우선 책들을 읽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수업은 휴강이라 시간도 많았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터라 쉬엄쉬엄 글로서라도 이 모든 상황과 앞에 나서는 이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헤겔의 『변증법』, 이영희 외 『현실인식의 논리』 ,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등. 노래도 불러보았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광야에서>,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김민기의 <아침이슬> 등등. 조금씩 현실적 상황이 파악하게 되었다. 책들, 노래 그리고 뉴스, 칼럼들을 통해 조금씩 상황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만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지지는 하되 매몰되지는 말자는 생각을 했다. 객관적 인식과 판단을 통해 최소한 대학생들인 그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이유 그리고 잘못된 부분과 사건들을 조금은 수 있었다. 


“넌 연극영화과 미술대학에 갔어야 하는데 잘못 온 것 같다” 굽실 굽실 펌 머리에 귀를 뚫어 큰 링 귀걸이하고 7cm 힐을 신고 다니는 신입생인 나를 보고 선배들은 한 마디씩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학과 대다수의 여학생들은 백 대신 백 팩을, 구두대신 운동화를, 화장대신 민낯에 서울보다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구성원들로 내 차림은 굉장히 눈에 띄는 소위 요즘 말로 강남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아랑곳하지 않고 유행하는 스타일로 교정을 누비고 다녔다. 당시 내 인생에서 가장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 힘들었던 시기에 고작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선배들의 잘못된 선입견에 대해 씁쓸한 감정과 반감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나는 영화 속 광장에 있었다. 그들과 함께. 그날만큼은 함께 손뼉 치며 주변인이 아닌 참여자로서 지지자로서 하나의 힘을 보태었다. 영화를 보며 그때 그 시절 그 순간이 다시금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날, 늘 화려한 차림의 난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동기들과 선배들 그리고 시민들과 구호를 외치며 시청에서 명동까지 걸으며 행진했다 단지 하루 참여자였고 소심했던 나를 옆에서 보호해 주며 역사의 순간에 함께 있게 해 주었던  선배들의 모습은 잊을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4월 그날, 내 발밑에 사과 탄이 떨어져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 난 그 시대를,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난 한편에 치우진 삶을 살아가며 단편적인 시각으로 편협된 사고를 하지 않았을까. 그날의 그 사건은 어떤 상황에서든 양쪽 모두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또한 내게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해 주었다. 우리는 누구가 예상치 못한 일을 통해 가치관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고 상하좌우를 바라보는 입체적인 시각으로 치우치지 않은 글을 쓴다면 그 얼마나 가치로울까   젊음이 행동하는 것이라면 나이 듦은 보다 인생을 바라보는 글들로 채워야 할 것 같다.  시대가 지나온 아프지만 찬란했던 특별한 경험들을 글감으로 모아 인생 배낭에 채워 넣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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