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엇갈린 목욕탕
나는 주례 행사로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다녔다.
동네마다 목욕탕이 한 두 개 씩은 있었다.
남녀로 분리가 되었고, 중앙에 큰 온탕이 있었다.
거기서 10여분 간 몸을 일단 불려야 했다.
나는 가끔 온탕 물이 너무 뜨거워서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일단 돈을 지불하고 간
목욕탕이니 제대로 해야 했다.
엄마는 호랑이같이 딸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폈다.
그것은 일종의 사명감과도 같았다. 딸들을 깨끗이 씻기고,
목욕비가 아깝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거다.
보통 두 번에 걸친 때밀이가 시작된다.
먼저는 좀 시커먼 때가 줄줄 밀려났다.
그리고 한두 번 물로 헹군 다음 2차에 들어가면 때의 색이 옅어져서 밝은 회색빛깔이 되었다.
연둣빛의 이태리 타올로 때를 미는 건 나에겐 너무 아픈 고문과도 같았다.
가끔은 세게 민 곳의 피부가 빨갛게 붓거나 며칠 뒤 딱지가 생기기도 했다.
목욕탕에 목욕을 하러 간 것만은 아니다.
엄마는 아이들의 속옷과 내복, 그리고 수건까지 들고 가서
'빨래 금지'라는 푯말이 무색하게 그 앞에서 당당하게 손빨래를 하였다.
심지어 빨래판까지 들고 갔다.
목욕탕에서는 다이얼 비누 냄새와 더불어 하얀 빨랫비누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얀 김이 올라오는 목욕탕 내부의 공간 그리고 물이 줄줄 흐르던 거울과
빨래하는 소리, 첨벙첨벙 바가지로 물 퍼는 소리, 싹싹 때를 미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었다. 미끌거리던 비누와 억센 이태리타월의 촉감, 보이는 것은 온통 살색 벗은 몸,
가끔 맛이 나는 매운맛 비누와 맹맹한 물맛.
당시 집안에 욕실을 갖춘 집은 흔치 않았다.
특히 추운 겨울날 집에서 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거나 너무 힘든 일이었다.
물론 연탄보일러 위에 설치할 수 있는 온탕기가 보급되어 유행하긴 했다.
호스 달린 뚜껑을 연탄아궁이 위에 올려놓으면, 호스가 연결된 빨간 고무물통 안 물이 천천히 데워졌다.
연탄불이 세면 좀 더 빨리 데워졌지만.
연탄 두 장이 위아래로 아귀가 잘 맞지 않거나,
여러 가지 연유로 불완전 연소가 될 때는 물이 너무 더디 데워져서
한 사람이 씻고 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란 고무물통에 들어가는 물의 양도 40리터가 될까 말까 했다.
게다가 욕실이 따로 있지 않고 재래식 부엌 안에서 씻어야 하다 보니
특히 학교 갈 시간엔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당당히 목욕비를 받아서 혼자 가기도 하고,
언니들과 가거나 했다. 혼자 가면 자유로워서 좋지만 아무래도 등을 밀기가 어려웠다.
옆사람과 서로 밀어주기도 했지만, 국민학생인 영은이는 손아귀 힘이 없으니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영은이는 목욕탕에 목욕만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기도 하고,
냉탕에서는 잠수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일종의 물놀이 시간을 즐겼다.
1,2차에 걸친 때밀이와 물놀이를 합해서 딱 1시간이 걸렸다.
1차의 때밀이 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배운 게 무섭다고 늘 두 번 밀었으니까, 하던 대로 하게 되었다.
나는 어느 추운 겨울방학,
일요일 아침 큰언니와 목욕탕을 가기로 했다.
큰언니가 수건과 세정용품 등을 챙겨갈 테니 나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언니가 와서 돈 드릴테니까네, 먼저 들어간다 캐라."
"알았다, 빨리 온나."
목욕탕에 도착하여 나는 이야기했다.
"우리 언니 오면 목욕비 줄거라예."
"오이야, 들어가기라."
나는 목욕 후 나른함과 개운함을 기대하며 수명탕에 들어갔다.
일단 옷을 벗고, 온탕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큰언니가 안 오는 거다.
수건도 이태리타월도 준비되지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때 큰언니가 목욕탕에 다짜고짜 들어와서
"가시나 니, 와 여기 있노?"
"언니가 먼저 가라 캐서 여기 왔는데, 와 그라노?"
"당감탕에 갔는데, 네가 없다 아이가? 설마 하고 와 봤더구먼 와 여기 있노?"
언니가 노발대발하며 면박을 주자, 나도 당황했다.
"빨리 닦고 나온나."
"수건 없는데, 우짜노?"
"러닝셔츠로 닦으라매."
나는 큰언니가 소리치니까 서러워서 울면서 대충 물을 닦았다.
나는 평소 혼자 잘 다니던, 집에 가까운 수명탕을 간 것이다.
큰언니는 광안 시장 안에 있는 당감탕을 생각했다. 좀 더 멀어도 시장 안이라
목욕 후에 영은이한테 떡볶이도 사주고, 산책도 하려고 했었다.
당감탕인 이유는 사장이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이사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날은 목욕도 제대로 못하고 목욕비만 날렸다.
나는 큰언니가 엄마보다 더 무섭기만 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약속 장소를 잘 확인해야겠다고.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냉탕에서 좀 더 놀 걸.' 하고 말이다.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욕도 했다.
'첨부터 제대로 가르쳐주지 그라노.'
그리고 다짐도 했다.
"나는 친절하게 대하자.
실수해도 따뜻이 일러주자."
또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될 걸 괜히 긴장했네.
큰언니는 나름 화가 났겠지만,
당감탕에 내가 없으면
수명탕에 와서 찾아보고
내가 거기 있으면 거기서
목욕을 하면 됐을 텐데.
누구의 잘못도 아닌 소통의 부재 혹은 실수였다.
가만 보면 큰언니는 불 같이 화내는 아빠랑 똑 닮았다.
이제는 목욕탕 갈 일이 전혀 없다.
수영장에 가더라도 가볍게 샤워를 하고 만다.
때를 미는 행동이 피부에 얼마나 악영향인지 듣고부터는
때를 밀지 않는다.
밀지 않아도 딱히 때가 나오지도 않는다.
거의 매일 샤워를 집에서 할 수 있고,
한여름에도 온수가 나오는 편리한 욕실.
동네마다 길게 하늘 높이 우뚝 선 목욕탕 굴뚝이 보였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만 풍경이다.
아련한 옛 추억, 목욕탕.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지만,
나는 그때 그 시절 목욕탕과 큰언니의 목소리와,
여러 감각을 상기시켜 본다.
목욕탕을 떠올렸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저마다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때 그 시절 목욕탕에서 때를 밀듯이
날마다 조금씩 씻어 내고, 때론 조금 남겨두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일까.
너무 많이 때를 밀면 아프고 생채기가 생기듯,
적당히 씻어내야 한다.
좋았든 힘들었든 오늘날에 이르러서
글감이 된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