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은의 비밀

#자랑스러운 큰언니

by 에스더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기 전까지는 딸 다섯이 그렇게 놀라운 일인지 몰랐다.

나는 유치원을 안 다녀봐서 국민학교가 처음으로 맞는 공식적인 대외활동이었다.

3월 학기 초가 되면 꼭 지나치지 않고 호구조사가 이뤄졌다.

질 낮은 종이에 피아노, 텔레비전, 냉장고, 침대 등이 있는지 체크하고,

자가인지 전세인지 체크했다. 형제가 몇 명인지도 적고, 이름과 다니는 학교까지 적었다.

1학년 때 교탁 위에 사발면 놓고 후루룩 먹던 선생님이 지금도 생각난다.

손을 들어 형제 한 명부터 시작하다 셋이 넘어간다. 넷도 없다.

그런데 다섯 명에

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물었다.


"진짜로 다섯이가?"

"네, 맞는데예."

"아들이 몇 명인데?"

"딸만 다섯 명인데예."

"진짜로 딸만 다섯이가? 아들이 한 명도 없나?"


나는 그때 몇 번이나 되물으며 놀라 자빠질 것 같던 선생님의 목소리와 표정이 잊히질 않았다.

휘둥그레 뜬 작은 눈, 진짜 놀란 커다란 목소리, 아이들의 함성 같던 '와' 소리.

그런 경험들로 인해서 나는 딸만 다섯 있는 자신의 가족이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5학년이 되어서는 누가 놀라든 말든 신경도 안 쓰일 만큼 이력이 났다.

3월 초에 또 이뤄진 호구조사에서 영은이는 아빠와 엄마의 성명과 나이, 학력 등을 썼다.

그리고 큰언니 호영숙, 둘째 호영애, 셋째 호영의, 동생 호영남의 이름을 쓰고 나이와 다니는 학교를 썼다.

큰언니 호영숙은 P대학 영어교육과에 다니고 있었다.

친척들 집에 가도 다들 대단하다고 했다. 혹은 영문학과와 헷갈려하기도 했다.

영어교육학과라고도 했다. 그러나 영어교육과의 영문학과는 아예 다르다. 사범대와 인문대.

여하튼 큰언니는 본고사 300점 만점에 282점을 맞았다. 의대로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큰언니가 다니는 대학이 그리 대단할 줄이야.

영은이 담임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발령받은 신입교사였다.

수업 중간에 영은이에게 다가와 물었다.


"영은아, 니 언니 영어교육과 다니나?"

"네, 맞아예."

"영은아, 너거 언니 진짜 P대학교 다니는 기가?"

"맞다고예."


영은이에게 계속 물으니까 영은이는 슬슬 짜증이 났다.

큰언니는 늘 수재소리를 들었다. 중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고등학교에서도 전교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전교 1등을 자주 했다.

휴일이 되면 가끔 내 손을 잡고 시내 대형 서점에 갔다.

동네 골목길을 돌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갔다.

동보서적과 영광도서에 가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 같던 작은 글씨가 세로로 적힌 고전을 샀다.


'제인 에어', '전쟁과 평화' 등 영은이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심심할 때 읽었다.

그리고 큰언니는 집에서 팝송을 들었다.

클래식 카세트테이프가 시리즈로 있었다.

팝송도 있었다.


"I just called you to say I love you~~~."

"Countryroad, take me home to the place ~~~."


뜻은 몰라도 나는 노랫말을 흥얼거렸고,

큰언니가 영어선생님 될 거니까 그냥 영어가 좋았다.

그리고 큰언니는 나에게 약속을 했다.


"언니가 선생님 되면은 우리 영은이한테 침대도 사주고, 피아노도 사주꾸마."

"진짜로?"

"꼭 사주래이, 약속 지켜야 된대이."


나는 자신이 그 대학에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우쭐해졌다.

나중에 알았다. 후광효과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나도 멀리 서울까지는 엄두가 안 나고 큰언니가 다니는 대학쯤엔 쉽게 갈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했다.

내 눈에 큰언니는 늘 소설책 읽고, 팝송 듣고 놀기만 하는 것 같아서 대학 가기 엄청 쉬운 줄로 알았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먼 나중에 나는 그 대학 사범대학에 진짜로 입학하게 되었다.

나에게 큰언니는 자랑스러운 언니요, 누가 뭐래도 마음속 롤모델이자 슈퍼스타였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나는 아이돌이나 탤런트, 운동선수 등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바로 옆에 멋진 큰언니가 있으니까.


그런데 큰언니는 공부만 잘했지, 어느 면에서는 또 어리숙했다.

이건 참 어렵게 꺼내는 이야기인데, 큰 형부가 볼 일이 없을 듯하여 시원하게 풀어본다.


큰언니는 자기 친구를 따라서 동네에서 가까운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거기서 만난 찌질이 형부를 만났다. 미안하지만 큰 형부는 찌질이다.

당시는 부잣집 아들이어서 큰언니가 잘살줄 만 알았다.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형부가 주식으로 왕창 날려먹고 집을 팔아야 했는데, 또 주식에 손대었으니까.

평생 생활비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으면서, 최신 휴대폰만 사고 지금도 그러고 사니까.


그런데 그 찌질이 형부가 당시 국민학교 다니던 나에게는 멋있긴 했다.

하얀 자가용도 있고, 떡볶이나 햄버거스테이크와 양념통닭과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롯데리아 불고기 버거 등을 사주고, 영도에 있는 목장원이라는 당시 고급 피자집에도 데려가주었다. 다 큰언니한테 잘 보여서 결혼하려고 애쓴 거니까 그것도 안 고마울 만큼 지금은 좀 밉다. 큰언니 눈에 눈물 나게 하고 언니 친구들은 다들 부자로 잘 살기만 하는데, 언니는 안 그러니까.


큰언니한테 미안한 것은 당시 밤마다 한두 시간씩 통화를 하니까

너무 짜증이 나고 하릴없는 소리를 지껄이니까 전화기 옆에다 대고

그렇게 끊으라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던 거다.

큰언니는 호랑이 아버지가 무섭지도 않았나 보다.

하긴 연애 중이니 죄다 장밋빛이었을 거다.


언니가 약혼을 하고 받아온 상자에 담긴 선물이 아직도 기억난다.

진주가 박힌 목걸이와 반지, 그리고 꽃받침 같던 목 장식이 예쁜 디자인의 베이지색 니트와 언니가

학교에 갈 때 들고 다닐만한 핸드백의 들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한 때 어린 소녀였고, 사랑받는 연인이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엄마였고, 재미있고 잘 가르치는 좋은 영어 선생님이었던 큰언니.


큰언니 덕분에 언니 신혼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조카들을 돌보면서 아이 다루는 법도 배웠다.

큰언니가 캐나다에도 데려가주어 어학연수도 할 수 있었다. 언니는 침대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내가 결혼할 때 가전과 가구를 사주었다. 나는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화장품 사고, 옷 사고, 펑펑 쓰고 다녔다. 조금 모아놓으면 임용고시 본다고 탕진해 버렸다.

내가 영어강사 하면서 도저히 임용 준비를 못하겠다고 우는 소리를 하니까,

그냥 준 건 아니지만, 학원비와 생활비도 대주었던 고마운 큰언니.

나중에 영어강사를 하면서 아주 빨리 다 갚았다. 이자로는 맛있는 빵과 치킨.


K장녀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평생을 가족 걱정, 동생들 걱정하면서 돈을 대주고 신경 써준 고마운 언니가 앞으로 남은 평생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내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큰언니에게 큰집을 사주고 싶다.

그럼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아니다. 꼭 부자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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