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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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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an 11. 2024

순애(殉愛/純愛)

나와 순애

140.

순애가 집에 올 때는, 번호 누르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순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새벽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올 만한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으니까, 알 수 있었다는 말은 조금 웃긴 말이려나.

순애는 언제나 집에 오면, 한겨울에 노천탕에 들어온 사람처럼, 편안한 숨을 내뱉고는,

  -나왔어.

현관으로 나가보면, 어떨 때는 팔을 활짝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던가, 그럴 여력이 없었던 날에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소파로 털썩 주저앉는다던가.

보통은 둘 중 하나였다. 근데 그날 순애가 우리 집에 왔을 때는 패턴이 조금 달랐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는 소리. 저번에 마무리가 썩 좋지 않았음에도 다시 찾아온 순애가 반가웠고, 내뱉던 깊은 한숨까지도 똑같았지만

  -잠시 여기로 와봐.

  -왜요?

  -줄 거 있어.

현관으로 갔을 땐, 순애가 활짝 웃는 표정으로 식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키워.

  -웬 식물이에요?

  -너네 집은 나 없으면 살아있는 게 없잖아. 생각해 보니까 조금 짠해서.

  -식물 안 키우는데.

  -라는 이유는 사실 둘러대려고 준비한 이유고, 진짜 이유는 미안해서.

  -어떤 게요?

  -저번에 화낸 거. 내가 잘못했어.

  -뭘요. 제가 괜한 걸 물어봤죠.

  -식물 이름은 뭘로 해요?

  -순애로 해.

  -말려 죽여야지.

  -허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고 그러냐.

  -농담이죠.

  -밥 먹었어요?

  -아니, 아직.

  -밥 먹죠.

  -내가 이 말 들으려고 여기 오잖아.

  -밥 먹자는 말이요?

  -응, 되게 좋은 말이잖아. 뭐랄까, 되게 안정감이 든다고 해야 되나.

  -세 번 먹을까요?

  -꺅 뭔가 야하다.

  -?

그날 이후로, 나와 순애는 전과 다르게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꽤나 많은 정보와 이것저것과 이곳저곳을.

만약 당신이 나의 저주를 피하고 싶었다면, 그날 당신은 나의 집에 찾아왔어서는 안 됐다. 아니, 찾아왔었더라도 적어도 그 식물은 줬으면 안 됐고, 설령 그걸 줬었더라도 그 뒤에도 똑같이 나에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었어야 했다.

그랬었더라면, 아마 내 삶은 여전히 그대로였을 거야.

그랬겠지, 순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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