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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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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an 17. 2024

순애(殉愛/純愛)

나와 순애

144.

그 여자는 종종 아무런 기약 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날 때가 있었다.

훌쩍이라고 해봤자, 정말 어디론가 멀리 떠났는지, 아니면 우리 집으로부터 멀리 떠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 이틀 밤이 되어도 순애가 집에 찾아오지 않을 떄면, 그저 어디론가 멀리 출장을 가지 않았을까, 지레짐작을 하곤 했다.

순애의 출장은 몇 일이 걸릴 때도 있었고, 몇 주가 걸릴 때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순애가 이민을 가지 않았길 바라는 것 뿐이었다.

이번 출장은 숫자를 세다가 포기할 정도로 꽤나 긴 출장이었다. 경찰에 실종신고라도 해야 싶었을 때에, 순애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찾아왔다.

  -번호 안 바꼈네, 잘 있었어?

순애가 헤실거리며 들어왔다.

  -어, 오랜만이네요. 저야 뭐, 언제나 잘 있었죠.

  -비밀번호는 두 달에 한 번씩은 바꿔 줘야 돼. 밥은 먹었어?

  -아뇨, 아직요.

  -먹고싶은 거 있어? 시켜먹자. 맛있는 거 사줄게.

  -됐어요, 먹고싶은 거 먹어요.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삐졌어?

  -뭐가요.

  -에이, 왜 그래~ 내가 미안해. 맛있는 거 사줄게.

  -그렇게 얄팍한 거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아요?

순애가 내 팔을 쿡쿡 찔렀다.

  -미안하다니까~ 일이 바빴어.

  -어? 웃었다.

  -제가 언제요.

  -방금 조금 웃었는데?

  -잘못 봤겠죠.

  -나는 잘못 안 해. 그러니까 잘못 볼 일도 없어.

  - ···

  -그래, 이번 건 내가 조금 나빴지. 인정해. 그러니까, 먹고싶은 거 골라봐. 술도 조금 마실까? 나 요즘에 진짜 힘들었단 말이야.

  -여기 못 왔던 게 제일 힘들었다고 말하세요.

  -여기··· 뭐라고 했었지?

  -자, 따라하세요. 여기 못 왔던 게,

  -여기 못 왔던 게,

  -제일 힘들었어.

  -제일 힘들었나?

  -안 해.

  -장난이지 장난, 여기 못 왔던 게 제일 힘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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