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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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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일 Jan 29. 2024

순애(殉愛/純愛)

나와 순애

152.

사실 나는 이 여자와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정의하기 애매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도. 순애가 정의한 관계와, 내가 관철하고 싶었던 정의가 달랐다는 것 역시도.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결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뻔한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건, 피아노를 연습할 때 계속 잘못 눌리는 하얀 건반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삶에선 순애가 그랬으니까. 그 여자는 단조롭게 흘러가던 내 일상생활에서 잘못 눌린 건반처럼 툭 튀어나와서는 내 일상을 다른 음악으로 바꾸었다.

그때부터 순애는 음악을 듣는 것만큼이나 일상이었다. 이대로 흘러가버리면 그대로 끝나버릴.

또 한 번의 하얀 건반이 필요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언제나 갈증을 일으켜도, 들이킬 건 짭짤한 붉은 피밖에 없었던 우리 관계가 6분 21초까지 흘러왔다.






겨울을 함께 보냈다.

여전히 평범함에서 크게 동떨어져있지 않았던 일상이었다. 순애는 밤이 되면 우리 집에 왔고, 밥을 함께 먹었고, 피키 블라인더스를 봤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섹스를 하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소파에서 그대로 잠에 들었고, 어떤 날에는 침대로 가서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내 물음에 순애의 대답이 5분 뒤쯤 돌아올 때면 나도 잠에 들 뿐이었다. 순애는 없었고, 커피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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