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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Oct 15. 2021

마음만은 나빌레라

무거운 엄마의 성인 발레 도전기

요즘은 걸음마만 떼면 각종 '문화센터 표' 발레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 딸 가진 엄마들의 필수 코스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발레는 선택받은 자들만 향유할 수 있는 고급문화였다. 새하얀 튜튜에 불투명 타이즈, 발등에서 X자로 교차되는 공단 리본 달린 토슈즈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잔머리 한 올 없이 사악 빗어 넘긴 올림머리에 무시무시한 무대화장을 하고 목과 허리를 길게 뺀 채 걸어 다니는 어린 백조들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종족이었고, 감히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라는 말을 뱉을 수도 없던 그 시절. 마음속 저 깊이 숨겨둔 백조에 대한 열망은 딸을 낳는 순간 함께 세상으로 튀어나왔다.


서너 살 아가들이 답답한 타이즈에 까슬한 망사 튜튜를 좋아할 리 없지만 매주 엄마들이 어르고 달래 옷을 입히고 발레 교실에 들이밀며 40분 간 사진을 400장 정도 찍는 마음들은 아마도 다들 비슷했을 거다. 자식에게 내 꿈을 투영시키지 말라고 그렇게 남들에게 훈계질을 하면서도, 나 또한 그 길에서 비껴 나진 못했다. 매주 따갑고 바스락거린다고 짜증 부리는 딸아이를 아이스크림과 젤리로 꼬셔서 발레교실로 몰고 가던 그 시절, '앙바, 안 아방, 아라베스크'를 읊으며 짧은 팔다리로 버둥대는 아기 백조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스마트폰이 가득 차던 그 시절, 발레 교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하루 종일 흥얼거리며 나는 엄마 백조라도 된 듯 발끝으로 걷곤 했다.


짤뚱하고 귀여운 아가 발레리나 봄


그렇게 대리만족이라도 오래오래 기쁘게 누리고 싶었건만, 아이는 정확한 언어로 의사표현이 가능해지자 바로 발레를 그만두겠다 선언했다. 순전히 나의 인형놀이를 위해 사 모으던 튜튜 원피스와 발레 슈즈들도 그렇게 안녕. 또다시 이루어지지 못한 발레와의 사랑 앞에 서글퍼질 무렵, 우연히 시립 발레단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심지어 무료로- 발레 교실을 연다는 공고를 보았다. 선착순 모집이라 고민할 새도 없이 바로 전화를 걸어 신청하며 다음날 새벽 도착하는 로켓 배송으로 발레 슈즈도 구입했다. 천 6백 겹 정도 되는 무릎길이의 튜튜도 함께 장바구니에 넣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드디어 대망의  수업, 운동용 레깅스 위에  스커트를   입고 공연장 지하에 있는 연습실로 사뿐사뿐 달려갔다. 여리여리 길고 가느다란 선이 하느작거리는 이미지를 그리며 무거운 방음문을 쓰으윽 밀고 들어간 순간,  멀리 길고 두툼하고 퉁퉁한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다.  자신.  면이 거울로  방에서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잊고 있었다. 이미 나는 백조에서 한참 멀어진 푸근한 인간이 되어있었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래도 의기소침해지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나이에 진짜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즐겁게 재미있게 하면 되지 . 그제야 주변에 주춤주춤  있는 운동복 차림의 아줌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누며 발레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발레 첫 수업, 'ㄴ'자로 앉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누가 발레를 우아한 예술이라 하였던가. 발레는 그동안 내가   활동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운동'이었다. 바른 자세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길게 팔을 늘어뜨려 뻗었다 오므리는 동작  번만에 팔다리가 덜덜덜 떨려왔다. 우아한 피아노 반주 사이사이로 참을  없는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부들부들 휴우우 흐흐흐 아이고아이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이 슬퍼지는 순간들, 그래도 사뿐사뿐 경쾌한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드럽게 -사실은 어설프게-  마디마디와 근육을 쭈욱 쭈욱 늘려주는 순간들은 아프지만 행복했다. '정수리에 끈을 묶어서 누가 위에서 당기는 느낌으로' 목을 주욱 빼고 어깨와 골반을 일자로 '스퀘어 박스' 만들고, 무릎은 붙이고 발끝은 열어서....... 하아. 백조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그리하여 김보보는 마흔 무렵에 길고 여리한 곡선을 회복하며 아름다운 백조 같은 발레리나로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났으면  좋겠지만, 어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필라테스 강사라는 '젊은 언니'  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줌마들은 다리 찢기는 커녕 기본 자세 외우기도 성공하지 못한   학기의 종강을 맞이했다. 하지만 괜찮다. 사뿐  사뿐  연습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샤세' '' 연결하던  나는 지젤이었고, 발가락 끝으로 서진 못해도 까치발을 들고 ' 아방' 자세로 총총총총 돌던 순간 나는 오데뜨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괜히 발레 피아노 곡을 틀어놓고 발끝을 오므렸다 폈다 하고 종아리를  늘리다가 "" 소리와 함께 쥐가 나는 날도   이어졌지만, 어쨌든 나는 '발레인'이다...라는 문장을 쓰는 순간 구부정하게 어깨를 말고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나를 발견한다. 휴우. 아무래도 다시 발레를 시작해야겠다. 아랫배에   주고 어깨 펴고 발끝 세우고! 유튜브 발레핏이라도 따라 해야지. 몸은 자꾸만 둥글둥글 말리지만 마음만은 나비처럼 백조처럼, 사뿐사뿐 우아하고 고고하게. 무거운 엄마의 발레 도전기는 계속된다.


다음 생엔 날아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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