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커피 유랑단

참기름처럼 진득하고 쫀득한 에스프레소를 찾아서

by 언제나봄

역시, 계절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법이지. 시간에 금이 그어진 것도 아니거늘 달력 한 장이 넘어가면 어떻게 이렇게 알고 공기가 훅 달라지는지, 벌써 몇 번째의 계절을 맞이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건만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하는 건 신기하고도 신비로운 일이다.


나이 탓인지 몇 해 전부터 여름이 영 부대끼고 힘들어졌다. 꼼짝 않고 칩거생활을 이어가다 드디어 창밖에서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나서야 주섬주섬 문밖을 나설 채비를 해본다. 쫀득한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다고, 종류별로 구비해 둔 캡슐 머신이며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사모은 원두와 모카포트를 사뿐히 지나쳐 진정한 커피 맛집을 찾겠다며 동네 카페를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어쩌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여기를 가보고 저기를 가봐도 못내 아쉬웠던 한 가지가, 지척에 두고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꼭 막판에 이 문을 열지 못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리웠던 그 맛을 마주한다. 얼음이 녹으며 맛을 균형을 깨뜨릴까봐 얼음은 딱 한 개만, 적당히 푹신하고 달큰한 유크림 위로 조심스레 떨어진, 마치 두 손으로 꼬옥 움켜쥐고 짜낸 듯 진득한 에스프레소. 그리고 이 모든 걸 포슬포슬 덮어주는 코코아 파우더까지.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얼음물 한 잔을 늘 함께 내어주는 그 배려가, 이탈리아 어느 커피 하우스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동그란 레코드판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딱 적절한 볼륨의 재즈가 공간을 아늑하게 가득 채우는 곳. 과하게 반겨주지 않지만 첫 방문이 아닌 걸 알고는 있다는 전형적인 내향인들의 눈인사가 다행스러운, 나만 알고 싶은 우리 동네 조그마한 동네 카페.


언젠가 조금 용기를 내본다면, 한 구석에 자리한 업라이트 피아노 뚜껑을 한 번 열어봐야지. 집에 있는 피아노 두 대에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았을지언정 어딘가 놓여있는 피아노를 마주하면 그래도 한 번 앉아 소리를 내보고 싶은 걸 보면, 아직은 예술가의 영혼이 나를 떠나지는 않았나 보다. 가을의 문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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