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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Oct 05. 2022

연애시장 악성재고

나는 악성 재고다. 30년간 선반에 있었으면 이제 창고로 들어갈 때다. 보통 물건은 10~20년 안에 처음으로 팔리고, 반품되고, 보통 그 과정을 반복한다. 한 번이라도 팔린 물건은 반품되어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연애시장 유경험 선반에 진열한다. 선반은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물건이 진열되어 있다. 포장이 예쁜지. 내용물은 어떤지. 제조 공장이 어떤지. 한 번도 팔리지 않은 물건은 점점 더 잘 보이지 않는 선반으로 옮겨진다. 지금까지의 나의 보관 년수나 다른 사항을 고려하면, 내가 창고에 들어가는 데엔 1년이 채 남지 않았다.


연식은 꽤 중요하다. 상품마다 다르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법칙은 하나 있으니, 25년에서 30년 정도 한 번도 팔리지 않은 제품은 보통 제품이 아니라 재고라고 한다. 까놓고 말하자면 악성 재고, 결함품 등으로 부를 수도 있다. 30년간 선반에 있던 나는 이제 창고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해야 한다. 제품 택을 떼고 상자 위에 '재고'란 스티커를 붙일 때다.


처음부터 안 팔린 건 아니었다.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각자 다른 제조 공정을 거친다. 소위 '팔리기 쉽지 않은' 제조 공정을 거치는 경우도 있다. 제조 환경. 나는 거기에 핑계를 대기엔 좀 근거가 빈약하다. 그럼 포장을 한번 봐야 한다. 포장 상태가 좀 안 좋긴 하다. 다른 상품보다 눈에 띄게 작다. 여하간, 그래도 나는 제품인 동시에 제품을 팔아야하는 마케터이며 제조사이기도 하다. 그러면 나도 노력은 해야 한다. 그리고 노력했다. 제품이 안 팔리면 나만 손해니까.


제품이 팔리려면 제품이 가진 단점은 줄이고 기능을 추가하거나 장점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제품에 춤을 추는 기능을 추가했다. 외국어 기능을 추가했다. 또 이것 저것 만지작거리며  기능을 추가했다. 제품 개량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름 준비가 되었다 생각해 다시 제품을 진열했다. 먼지도 털고, 조금 밝아 보이는 도료도 발라 봤다.


제품은 팔릴듯 말 듯 했다. 몇몇 소비자가 제품을 봤다. 문제는 그 소비자 중 하나는 다른 제품을 이미 구매한 손님이었다는 거고,  나를 꽤 오래 들고 흔들기만 했다. 어떤 손님은 이미 구매한 상품을 다른 손에 든 채 나를 들었다 놨다 하며 비교하다가 결국 떨어뜨리기도 했다는 거다. 손님들은 제품에 '재미가 없다', '~답지 않다' 등의 이유로 구매하지 않았다. 이 경우 제품마다 회복 속도는 다르다. 어떤 제품은 빠르면 며칠만에도 선반에 복귀하지만 느리면 시간이야 한정없다. 나란 제품은 내구성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원래 형태 비슷하게 돌아오는 데 시간이 년 단위로 걸렸다. 원래 모양와도 꽤 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팔린 적은 없는데, 팔려면 생활 기스라고 우겨야 할 만한 큰 흉이 생겼다고 할까.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나는 주위의 선반과 건너편의 '팔렸다 돌아온' 선반을 구경했다. 아. 세상은 변했다 싶었다. 남 탓을 할 일은 아니다. 내 제조 방법과 마케팅이 실패한 것에 남을 비난하고 탓할 수는 없다. 잘 보니 내가 만든 건 조악한, 심벌즈를 쳐 대는 원숭이 인형이었다. 털이 잔뜩 얼룩덜룩한 원숭이 인형은 말하는 버튼이 잘 눌리지 않는다. 누르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어딘가 뭉개진 듯한 소리가 난다. 농담 버튼을 누르면 10년 전에 멈춘 농담들이 찌그러진 쇳소리를 내며 난다. 주위에 다른 제품이 있으면 제품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도 봤다. 이 원숭이 인형은 팔리지 않겠구나. 신기한 건 내 옆의 제품들은 악성 재고까진 아닌 모양이다. 뭐가 다르냐면, 제품은 보통 20~30년이 될 즈음 자신이 있는 선반의 자릿세를 스스로 낸다. 창고로 갈 때까지, 아니면 창고가 아닌 선반에 계속 있기 위해. 이 심벌즈 치는 원숭이 제품은 온갖 곳에서 광대짓을 해서야 겨우겨우 제조사가 내주는 자릿세의 반이나 보탤까 말까 한다.


 아. 건너편 선반은 어땠냐고.


건너편 선반도 다양한 제품이 있다. 보통 팔리고 돌아오기를 최소 두 세번 정도 반복한 제품들이다. 잘 보아하니 요새 유행한다는 스마트 기기들을 닮아 있다. 주인의 필요과 욕구에 맞춘 기능이 탑재되어있고, 신기하게도 중고품일수록 더욱 노련하다나. 신제품이 좋은 건 어디까지나 10~20년 정도라던데. 사실인 모양이다. 다녀올 수록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다고도 들었다. '배려', '경청', '위로', '커뮤니케이션' 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어깨 너머로 주워 들은거라 잘은 모르겠다.


건너편 제품들 중 몇은 평생 같이 할 제품으로 선택되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되면 계약서 비슷한 걸 쓰는 모양이다. 듣자 하니 제품이 팔린 후 큰 결함 없이, 앞으로도 잘 사용할 수 있을 때 계약서를 작성한다는데, 심벌즈 치는 원숭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심벌즈 치는 원숭이는 최근에 건너편 상품 중 하나에게 차단이라는 걸 당했다. 원숭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원숭이가 시끄럽게 심벌즈를 친 건 아니다. 오히려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원숭이 장난감 주제에 더 고등한 제품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있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숭이 장난감의 잘못은 아닐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심벌즈 원숭이는 곧 악성 재고로 분류되어 영영 상자에 담겨 창고로 이송될 것이다. 이 창고에 들어가고 나면 보통 구매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건너편 선반의 제품은 내게 마케팅 조언을 했다. 제품을 더 자신감 있게 개조하라고. 외형을 다시 가꾸라고. 너 정도면 괜찮지, 라는 말도 했다. 그런 식으로 침울해져 있으면 더 안 돼.


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제 더 심벌즈를 칠 생각조차 들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제품이 그나마 가장 잘 생기고  멋졌던 시절에도 제품은 팔리지 않았다. 그 때도 더 잘난 제품들은 차고 넘쳤으니까. 난 살 필요가 없는 제품이었을 뿐. 고통이나 후회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제 털이 듬성듬성하고 침침한 눈의 원숭이 장난감은 시장과 가게가 원망스러운 단계도 지나갔다. 악성 재고는 악성 재고만의 삶과 시간이 있는 법이다. 챙. 챙. 챙. 챙. 챙. 하하. 챙. 챙. 챙. 챙. 내 자리가 아닌 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챙.챙.챙.챙.챙. 하하.




심벌즈를 너무 오래 쳤다. 상자에 들어가면 농담을 하는 기능을 빼고, 원숭이에게 입히는 옷들을 정리할 것이다. 나는 제품이기 이전에 작고 어둡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니까 악성 재고 창고로 보내져 제품의 기능이 정지할 때까지 어두운 상자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겠다. 기대하지 말고, 실망하지도 말고.


악성 재고 이야기가 조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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