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삶을 살아라
한 인간이 타인을 싫어하게 되는 계기는 단순하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먹이고, 그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한들 결국 이유는 하나다.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미숙한 동물이 미숙한 동물을 미워하는, 아이와 같은 행동일 뿐이다. 그 행위에 정당성은 없다.
글 박진권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야 할 명분도 없다. 내가 큰 실수를 해도 용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일에도 죽자고 덤벼드는 인간도 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일 필요 없고, 모든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강요하거나, 그게 기본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그들은 대체로 망가진 정신을 가리기 위해 허울 좋은 모습으로 위장한다. 사람은 신의 형상을 본뜬 것이지 신이 아니다. 미숙하고, 어리숙하고, 잘못을 반복하는 게 인간이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모임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의 과거를 상기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들과의 끈을 하루라도 빨리 잘라내야 한다. 그들의 시야에 당신은 없다.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망령을 붙잡고 있는 것은 오롯이 당신뿐이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옳다. 망령이 아닌 사람과 대화하는 게 의외의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상과 백날 싸워봤자, 결론은 나지 않는다. 결론 없는 부정은 사람의 뇌를 좀먹는 암 덩어리와 다름없다. 피해망상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든다. 강력한 추진력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어떻게든 나아간다 해도,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제동 장치가 발현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싶다면 계속해서 미워하고, 상기해도 된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게 좋다.
나는 당신의 행복을 기원한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얻고 누리는 일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져 있다. (중략) 이 때문에 가장 좋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많을수록, 따라서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 것이다”(『에우데모스 윤리학』 제7권 2장)라고 한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