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는 사람은 시체와 다름없다
출퇴근을 하며 사람에게 치이지 않는 것만으로, 삶의 질은 상당히 높아진다. 사람과 소통하고, 연결 되어있는 느낌이 적은 직업일수록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 당연히 신체적 피로가 수반되는 일이 아니라면 삶은 풍요롭다고 할 수 있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은 일상을 얻은 사람은 비교적 여유롭다. 노동하는 제1의 목표가 금전이 아닌 삶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꿈꾸어야 한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꿈을 말이다.
글 박진권
한국 사회는 꿈에 대해서 말하면 오그라든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혹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낭만에 빠져 사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한다. 남들처럼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서른이 넘어도 금전적으로 안정되지 않으면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꿈을 좇았고, 무슨 노력을 기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를 벌었고, 무엇을 얻어냈는지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가령 글 쓰는 작가가 꿈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아직 등단도 못 했는데, 무슨 작가야.’라는 반응이다. ‘본인 이름 박힌 책 한 권 나오면 작가라고 불러드릴게.’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무례함에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게 무례함인지 모르는 듯하다.
꿈은 막연한 게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건 단순한 망상일 뿐이다. 물론, 자기의 꿈을 위해 다른 부차적인 것들을 접목하는 것은 예외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뚜렷한 목표가 없는데 막연하게 ‘그게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은 꿈이라고 보기 어렵다. 스스로 정립되지 않은 생각이 자기의 생각이 아니듯, 명확하고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게 아니라면 꿈이 아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데, 명확한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간절하게 소망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는 것. 나만을 위한 게 아닌, 불특정 다수에게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일. 돈과 물건을 위한 게 아닌 그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의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꿈이다. 인간은 꿈을 꿔야 한다. 그게 바로 어렸을 때부터 하얀 종이 위에 자기의 꿈을 적는 이유다. 이렇게 말하면, 어쩐지 꿈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몇몇 사람은 꿈도 못 꾸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단순하게 하고 싶은 것과, 꿈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글 쓰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다.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소수의 누군가가 박진권이 쓴 책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에 티끌 같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 꿈은 거기서 완성된다. 돈과 명성은 부차적이고, 주요한 것은 내 글로 도움받은 누군가가 사회에 이로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열렬한 사회운동가는 아니다. 세상을 엄청나게 걱정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의 최종 목적지가 그런 것이 딸려있는 것뿐이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행동한 것이 발전할수록 이타적으로 변하게 되는 게 꿈이다. 꿈은 복잡하고, 멀어 보이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바로 눈앞에 보이기도 한다. 다시 갈피를 잡기 어렵고, 꿈이 무엇이었는지 상기하는 시간이 돌아오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여전히 꿈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꿈이란,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이룰 수 없는 게 꿈이다. 그저 올바른 방법으로 그곳으로 향하는 것, 남들이 먼저 발자국 낸 길의 낙엽을 청소하는 일이다. 그러다 언젠가는 나만의 길을 만들고, 후세의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걷는 게 바로 꿈이다.
철학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선언한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7~9장)의 말도 그와 같은 취지의 표현이다. 나아가 그가 『정치학』(제4권 11장)에서 “행복한 삶이란 아무런 방해 없이 유능함을 펼칠 수 있는 삶이다”라고 기술했는데, 이것을 철저히 해석하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자신의 탁월함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라는 의미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