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졌다. 망설임 없이 상체를 세움과 동시에 왼손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측면에 위치한 책상으로 천천히 다가갔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담뱃갑을 집었다. 곧이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기 위해 책상 곳곳을 살폈다. 정리되지 않은 펜과 그림들 사이를 휘저었으나, 라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담배를 넣은 뒤 책상으로 휙 하고 던졌다.
책상 너머에는 작은 소파와 통유리가 있다.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통유리 바깥으론 한적한 시골 마을이 훤히 보이는데 평안 속 고독이 왠지 모르게 서늘했다. 이내 소파에 앉아 어둠이 내린 시골 마을을 바라봤다. 잘 보이지도 않는 한갓진 마을 풍경을 보니 두려움도 잠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높은 건물도, 많은 사람도 없는 무채색의 마을이 어쩐지 아내와 닮아 있었다.
나는 방금 일어난 것을 망각하고 팔로 베개를 만들어 옆으로 누웠다. 기울어진 마을의 황량함 탓일까. 번득 우울이 찾아왔다. 원래도 굳어 있는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감정에 매몰된 나를 마주하는 게 끔찍하게도 싫었기에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감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양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고개를 떨구었다. 눈의 방향은 원목 바닥에 닿아 있었는데, 시선은 과거의 어떤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사색에 잠겼다. 결국 생각의 늪에 빠졌고, 아득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양손으로 허벅지를 짚고 일어나 창가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한 손을 창에 얹으니 차가움이 있는 그대로 느껴졌다. 그 서늘함이 내가 알던 냉소와 닮아있었다. 이내 손바닥을 거두고, 몸을 돌려 황급히 소파 곁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아내의 목소리가 작은 공간 안을 가득 채웠다.
'안 돼.'
다시금 책상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발치에 무엇인가 툭 하고 걸려 책상 언저리로 굴러갔다. 발가락에 치인 것은 분명히 라이터였다. 책상 근처에서 몸을 숙여 라이터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초록색 라이터가 모습을 드러냈고, 반사적으로 책상 위의 담뱃갑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조금 전 기상했을 때와 다름없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아까와 다른 점은 내 손에 라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기대감에 부풀어 담배를 있는 힘껏 빨아들이며 엄지손가락으로 부싯돌을 돌렸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결국 원하는 상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담배를 이빨로 문 상태 그대로 라이터의 가스가 얼마나 남았나 살폈다. 이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다시 넣고 있는 힘껏 구기고 비틀었다. 곧이어 구겨진 담뱃갑을 휴지통으로 던졌으나 모퉁이를 맞고 튕겨 나왔다. 사방에 담뱃재가 흩뿌려졌고, 나는 선채로 감정이 마구 요동쳤다. 억울한 기분을 꾹 눌러 담고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시침은 새벽 네시를 향해 있었다.
[2]
"여보."
섬뜩함과 단호함이 묻어 있는 짧은 음성이 내 청각을 강타했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아내가 먹먹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아래를 향했고, 새하얀 아내의 다리를 타고 흐르는 시뻘건 핏줄기는 내 몸을 경직시켰다. 곧이어 아내는 눈을 뒤집어 까며 비틀거렸다. 아내가 쓰러지기 전에 달려가 잡았어야 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덜컹인 나는 곧장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다가갔다. 아내의 볼에 손을 대자 전화에서 안내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내가, 쓰러졌습니다."
북적거리는 응급실 속 우리는 고요했다. 서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깨어나서 다행이다? 잡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벌써 세 번째 유산이다. 나는 알게 모르게 죄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아내의 손을 감싸 쥐었고, 아내 또한 말없이 내 손에 묶인 자신의 손을 천천히 빼내었다. 아주 잠깐 느껴졌던 온기가 빠져나가자 극심한 한기가 느껴졌다. 뼈 마디가 시렸고, 모든 근육이 뻐근했다. 이내 나는 기도하듯 스스로의 손을 모아 잡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아내의 입이 잠시나마 열렸다. 아내는 습기 없이 건조하고 갈라지는 소리로 내게 말했다.
"고개 들어."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응급실을 박차고 나왔다. 이 병원에서 나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헐레벌떡 병원을 뛰쳐나왔다. 문을 열고 현관을 바라보자, 어느샌가 하늘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앞을 보며 걸었다. 내 두 다리는 마치 목적지가 정해져 있던 것처럼 흡연구역으로 이동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냈다. 깊게 빨아들이며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고, 땅을 바라봤다. 폐의 가장자리까지 가득 들어찬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자 몸속에서 순환되지 않았던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땅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담배로 옮겼다. 담배는 느리게, 너무 느리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짧게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 내뱉으며 병원을 응시했다. 저 안에 그 사람이 있다. 생명을, 세 번이나 잉태했던, 그 사람이.
[3]
친구의 소개로 만난 아내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첫 만남부터 밝은 웃음을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한참 동안 여러 이야기를 하던 도중 아내가 돌연 표정을 지운 적이 있다. 맑은 미소 덕분에 자연스럽게 접히던 주름이 말끔하게 펴졌고, 말랑할 것 같던 얼굴이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놀란 나는 아내의 이름을 불렀고, 아내는 번뜩하고 다시금 생기를 뿜어냈다. 아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그녀의 한 마디에 말끔하게 지워졌다. "술은 좀 해요?"
이후 우리는 만날 때마다 술을 마셨고, 세 달 만에 연애를 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원래 술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래서 또 물었다. "그럼 나랑은 왜 그렇게 마시는 거야?" 그러자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알 수 없을 말을 내뱉었다. "미리 연습하는 거야. 누구 좀 살려보려고." 당시에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차분한 성격인데도 내뱉는 말들이 전부 재밌어서 농담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술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내의 직업과, 성격 그리고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해 봤을 때 술 때문에 생길 문제도 없었다. 아내는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아늑한 것을 선호했다. 와인을 마실 때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와 단 둘이 마시거나, 혼자 마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절대로 취할 때까지 마신적이 없었다. 한 번 마실 땐 두세 모금이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결혼 후 나타났다. 아내는 책을 읽을 때도 와인을 마셨고, 매 끼니마다 와인을 마셨다. 침실에도 항상 와인과 잔이 비치되어 있었다. 잠에 들기 전에 한 모금 그리고 새벽에 깬 후 한 모금 또 아침에 일어나서 한 모금. 매일 한 병씩을 비워냈다. 이제는 아내가 특별해 보이는 게 아니라, 괴이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집안 구석구석에서 와인의 알싸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괜찮아."
"병원을 가보자, 이건 아니야."
"괜찮아."
"와인을 하루에 한 병씩 비워내는데! "
"..."
" 그게 어떻게, 괜찮아..."
"괜찮아."
언젠가부터 나는 아내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문제를 제기했을 때 나오는 일반적인 반응을 아내한테선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단답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 무엇도 물어보지 않았다. 답답했다. 인형과 같이 사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덜 만들어진 인공지능 기계와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표정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이상한 아내의 얼굴은 산송장과 다름없었다. 아내는 있다, 없다. 혹은 죽었다, 살았다와 같이 이분법적인 사고로 표현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4]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신발을 벗으며 아내에게 이혼을 제안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고, 더 이상 죄인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뒤에 있는 아내의 표정이 궁금했으나,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대로 거실로 향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집구석에서 나는 와인 냄새가 지독하다.'그리고 '당신의 그 무표정도 지긋지긋하다.'또 '매일이 지옥이다.'등 여러 말들을 쉼 없이 뱉어냈다. 실컷 내뱉은 후 소파에 앉아 현관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내는 현관 앞에 그대로 서있었다. 심지어 우두커니 서서 내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순간 오싹함에 척추가 찌릿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아내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와인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와인 한 병을 꺼낸 뒤 방향을 틀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내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번에는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아내의 입술이 달싹였고, 아주 나긋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를 악 물고선 한 마디를 했다. '안 돼.' 그 말에는 분명 분노가 섞여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아내의 나직한 호통에 뇌가 굳어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는 와인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말 문도 굳게 닫혔다. 나는 손과 발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온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의 기억이 솟아날 때쯤 아내가 왼손을 들어 내 볼에 가져다 댔다. 따뜻함에 몸의 떨림도 멎기 시작했다. 아내는 마주 보고 있던 눈을 희번덕하며 위를 응시했다. 돌연 검은 자가 사라진 아내를 보자 두려웠지만, 아내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내를 보고 있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아내는 시선을 천장에 고정한 채 한 번 더 입술을 달싹였다. '어림도 없어.' 그리고 눈을 다시금 내리 깔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별장으로 가.'
[5]
별장은 시골의 작은 마을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초입에는 거대한 후박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나무의 높이는 웬만한 삼층 건물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가지가 뻗어나간 길이는 족히 백오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손이 닿는 가지에는 무수히 많은 천들이 걸려 있었고, 어딘가 모르게 무당이 굿을 하는 나무 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무를 지나면 황량하게 펼쳐진 하우스들과, 광대한 논밭이 나왔다. 그 뒤로 펼쳐진 산등성이 어딘가에 내 유배지가 위치해있다.
별장은 특이한 구조로 지어졌다. 삼십 평 정도의 넓이에 방이 하나도 없고, 팔각형이다. 정말 단 한 명 만을 위해 지어진 것 같은 모양새다. 별장 문을 밀자 끼익 소리와 함께 빛이 빨려 들어가며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비친 것은 굉장히 큰 책상이었다. 그 너머에는 작은 소파와 오십 인치 정도의 통창이 보였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내부는 반듯했으나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그리고 사람의 부재를 알리듯 빛에 반사된 먼지들이 소용돌이를 만들며 신나게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착용했다. 곧이어 신발을 벗으며 먼지가 쌓인 실내화를 응시했다. 신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더러운 신발을 신고 내부를 밟을 수는 없었다.
환한 낮이었음에도 내부는 어두웠다. 가장 먼저 사방에 있는 커튼과 창을 모두 열었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구형 턴테이블을 열었다. 뚜껑 덕분에 내부에는 먼지가 쌓여있지 않았다. 바로 밑에 있는 혼네의 엘피를 꺼내 끼웠다. 곧장 엘피 위에 바늘을 올렸고, 틱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구석에 박혀있던 초록색 선풍기를 강풍 회전으로 작동 후 중앙에 배치했다. 내 몸은 자연스럽게 현관 신발장에 걸려있는 먼지떨이를 집어 들었다. 느린 노래의 박자에 맞춰 집안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어낸 후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고무장갑을 낚아채 착용하며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화장실 문을 열자 바로 정면에 밀대가 보였다. 밀대에 차가운 물을 적셨고, 이내 고무장갑을 착용한 손으로 꾹꾹 눌러 때를 빼기 시작했다. 천이 적당히 불었을 때쯤 물을 끄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밀대에 빨랫비누를 문댔다. 그리고 손으로 죽죽 짜며 본격적으로 때를 빼냈다. 한참을 조물 거리던 손을 거두고 밀대를 물에 헹궈냈다. 밀대에서 투명한 물이 나올 때까지 그 행위를 반복했다. 깨끗해진 밀대에 다시금 물을 적셨다. 거실 바닥에 물이 흥건하지 않도록 강하게 쥐어짠 후 걸레질을 시작했다. 방 하나 없이 통짜의 내부는 걸레질하기 어렵지 않았다. 꼼꼼하게 바닥을 모두 닦은 후 다시금 주방으로 향했다. 찬장 어딘가에 있을 행주를 찾아내 가볍게 물에 적신 후 사물들을 닦아냈다. 한 번 먼지를 털어냈지만 묵은 때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키친타월로 모든 물기를 제거했다. 그렇게 조금 깨끗해진 내부를 보며 두 번 정도만 더 하면 사람 살만한 집으로 변하겠구나를 생각하며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개운한 기분으로 소파에 모로 누워 큰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올려 볼에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느껴본 아내의 따뜻한 손길을 생각했다.
[6]
열 살 무렵의 기억 속 어머니는 늘 술에 취해있었다. 저녁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어머니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때렸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말과 너같이 역겨운 피는 절대로 대를 이어선 안된다는 저주를 퍼부었다. 한 번은 나를 때리다 본인 화에 못 이겨 깨진 술병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살기 위해 뒤돌아 도망치기가 수십 번이었지만, 늘 피할 수는 없었다. 온몸에 흉터가 늘어갈 때쯤 나는 진화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기 전 새벽 네시에 완벽하게 눈이 떠졌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어나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휴대전화는 커녕 자명종도 없던 나로선 이것을 기적의 진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정신이 나간 어머니에게 반년 동안 단 한 번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아픈 곳이 없는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유지한 탓일까. 내 눈은 네 시 이십 분에 떠졌다. 더욱이 어제 한 숙제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졸이며 허둥지둥 책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찰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절망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는 마룻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머니는 그대로 내 머리채를 잡고는 거실까지 질질 끌고 갔다. 어머니는 옷장 밑에 숨겨둔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몸으로 내게 무엇을 잘못했냐는 질문을 했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맞았고, 해도 틀렸다며 또 맞았다. 그날따라 유독 심하게 맞은 나는 온몸이 뜨거워졌고, 목 안쪽에서부터 어떤 거품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서서히 정신이 꺼질 때까지도 어머니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빙빙 도는 천장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밀려왔다. 옆으로 돌아 토악질을 하고 나서야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나는 토사물을 치우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완전히 엎드려 머리와 함께 양팔로 지면을 밀어내고 나서야 겨우 앉을 수 있었다. 내 몸은 고정되지 못한 채 앞 뒤 양 옆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축 늘어진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입 또한 다물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앉아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어디선가 기분 나쁜 냄새가 밀려왔다. 어딘가 알싸하면서도 시큼한 냄새였다. 나는 냄새가 나는 쪽으로 겨우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깨진 술병을 손에 쥔 채 거실에서 대자로 뻗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순간 눈의 실핏줄이 터지는 게 느껴졌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몸이 조금씩 작동했다. 나는 깨진 술 병을 쥐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보았다. 곧이어 술병이 떨어지지 않도록 내 오른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움켜쥐었다. 곧바로 왼 손으로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관절이 접히는 방향으로 어머니의 팔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는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양손으로 목에 박힌 술병을 더듬거리며 뽑아내자, 빨간색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목의 구멍을 양손으로 틀어막으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피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엎드린 상태로 나를 향해 팔을 뻣으며 말했다. "너..."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피를 연신 삼켜내며 또다시 어떤 말을 내뱉었다. "다시..." 마지막으로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보자..."
[7]
담배를 이빨로 문 상태 그대로 라이터의 가스가 얼마나 남았나 살폈다. 이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다시 넣고 있는 힘껏 구기고 비틀었다. 곧이어 구겨진 담뱃갑을 휴지통으로 던졌으나 모퉁이를 맞고 튕겨 나왔다. 사방에 담뱃재가 흩뿌려졌고, 나는 선채로 감정이 마구 요동쳤다. 억울한 기분을 꾹 눌러 담고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시침은 새벽 네시를 향해 있었다.
책상을 등지로 뒤로 돌자, 바깥의 풍경이 왠지 모르게 더욱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입에선 새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돌연 낮아진 온도에 극심한 한기를 느낀 나는 팔짱을 끼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마치 누군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상당히 익숙했고, 좋지 않았다. 어릴 때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만 할 것 같았다. 펜도 그림도 버려둔 채 가방을 메고 현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고리에 손을 내밀 때쯤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 동시에 문 밖에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이내 쾅쾅 소리를 내며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문 밖의 사람이 말했다. "문 열어." 서늘한 아내의 소리에 나는 문고리를 향한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뒤에서 또다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쾅쾅쾅 아내는 연신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문 열어!" 나는 반사적으로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문이 열릴 때쯤 뒤에서 마지막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아내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살려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