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박진권

by 박진권



[0장, 밖]

꿈.


중학생의 나는 누군가의 미소에 첫눈에 반한다. 그렇게 장면이 전환되며 누군가와 데이트하는 고등학생의 내가 나타난다. 곧이어 성인이 된 나는 겹쳐진 엉덩이를 목격하고, 격분한다. 또 한 번 장면이 전환되며 웃고 있는 누군가가 등장한다. 그리고 어둠에서 나타난 남자가 누군가의 뒷목을 낚아챈다. 결국 누군가는 내 손에서 멀어진다. 나는 녹색에서 다시 시작된다.


수만 번의 꿈.






[1장, 방]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눈을 뜨자 흐릿한 천장이 나타났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며 주변을 황급하게 둘러봤다. 방은 완전한 사각형에 3평 정도 되어 보였다. 또 사면의 벽지와 바닥 그리고 천장의 색이 완전한 녹색이었다. 이곳은 가구도 없고, 심지어 문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녹색의 방이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이 조금 더 말끔해지니 그제야 내가 알몸이라는 사실도 인지했다.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은 단순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우두커니 서서 고민을 거듭하니 더욱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 공간에는 창도 문도 없었다. 내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벽으로 향했다. 벽면을 최대한 빈틈없이 꾹꾹 짚어보고, 바닥도 촘촘하게 눌러봤다. 영화에서 보던 어떤 기관장치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작은 공간에서 만져볼 수 없는 것은 천장이 유일했다. 나는 천장으로 들어온 게 확실했다. 그때 다시금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두 눈의 초점은 흐려지기 시작했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상태로 머리는 지면을 향해 돌진했다. 곧이어 속까지 울렁거리며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쿵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2장, 밖]

스물한 살의 내 일정은 항상 비슷했다. 6시부터 15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도착해 늦은 낮잠을 잤다. 그리고 17시쯤 일어나 책을 읽고 18시가 되면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19시쯤 퇴근하는 친구들과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술도 마셨다. 그러나 나는 분위기가 한창인 22시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매일 5시에 기상하기 때문에 일찍 취침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누군가가 없이 혼자 집으로 향할 땐 보통 23시쯤 잠에 든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일 때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미친 듯이 쾌락에 빠진다. 그렇게 새벽은 되어야 모든 기력을 탕진하고 함께 잠에 든다.


내 방에서 누군가와 같이 일어나는 일은 익숙했다. 우리는 자주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만, 교제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한 번은 이 특이한 관계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돌아온 답변은 "그냥 하는 사이지 뭐."였다. 처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사이가 되고 싶은 감정을 죽여야 했다. 그래야 욕정이라도 채울 수 있으니까. 그 욕구를 달래주는데 굳이 우리가 무슨 사이가 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5시에 일어나 씻은 후 굽지 않은 식빵을 먹었다. 씹는 것도 귀찮아 대충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그렇게 다시 일을 하러 나섰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불을 켰다. 누군가는 환한 빛에도 늘 미동이 없었다. 술냄새가 가득한 원룸의 냄새는 고약했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곧장 커튼을 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엉덩이를 세차게 갈기며 말했다.


"씻어."


누군가는 짧은 탄식과 함께 말없이 화장실로 기어갔다. 그동안 나는 침구를 정리하고, 탈취제를 뿌렸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화장실을 흘끔 보고, 다시 책 읽기를 반복했다. 이 순간엔 늘 초조해졌다. 마침내 화장실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이 순간이 좋았다.


"재밌어?"


"어, 뭐가?"


"그거, 책. 녹색의 방? 자주 읽네."


"그렇지, 뭐. 이게 내 인생의 해답지야."


나는 퇴근 후 집에 아무도 없을 땐 항상 낮잠을 잤다. 그런데 누군가가 있을 땐 달랐다. 과감하게 잠을 포기하고 누군가와 몸을 섞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술자리가 절정으로 무르익을 때 나는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는 따라나설 생각이 없었다. 내일은 낮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3장, 방]

나는 이마를 지면에 박은 상태 그대로 깨어났다. 여전히 정사각형의 녹색 방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바닥을 내려다봤다. 문득 기절 전에 눈앞에 무엇인가 보였던 게 생각이 났다. 나는 개처럼 네발로 빙빙 돌며 방의 구석들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무슨 글자가 있었다. 그때 한쪽 벽면의 구석에 검은색으로 표시된 무엇인가가 눈앞에 걸쳐졌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생각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누가 이 글자를 썼을까.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에 글자가 버젓이 적혀있다. 나는 그 글자를 응시하며 모로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곳에 갇히기 전을 기억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생각하라니... 무엇을?' 나는 천천히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때 벽에 무엇인가 나타났다. 나는 땅을 짚고 일어나 그 벽면으로 향했다. 벽에는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사진 속 인물은 다름 아닌 누군가였다. 누군가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온통 땀범벅이었다. 누군가는 옅은 미소와 함께 한껏 젖어있었다. 일순간 분노가 온몸을 감쌌다. 이곳에 나를 가둔 사람은 누군가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도 납치된 것이다.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괴성을 질렀다. 또 소리치며 벽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갈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말했다.


"당장 여기서 꺼내!"






[4장, 밖]

누군가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쾌활한 성격의 누군가는 나와는 다르게 모두와 친했다. 숫기가 없는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했고, 말도 건넸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혼자 하교하는 내 곁으로 와서 집이 어디냐고 물었고, 같은 방향이라며 함께 하교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등하교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반 친구들은 둘이 무슨 사이냐며 놀렸고,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나의 등을 툭 치고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친구지 뭐!"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했다. 누군가와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주 만났다. 고1 때부터 고3 때까지 단 한주도 거르지 않고 무조건 만났다. 장마에도, 폭설에도 그리고 태풍이 몰아쳐도 우리는 언제든 어떻게든 만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 우리는 결국 그냥 하게 될 사이였다. 그렇게 나는 점점 식어갔다. 어느 날부터 우리는 그저 하는 사이가 됐고, 때문에 활동 반경이 줄어들었다. 집 근처의 술집과, 내 원룸 그리고 가끔 카페가 우리가 돌아다니는 동선의 전부였다. 고등학생 때처럼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모든 게 다 귀찮았다. 누군가와는 책임감도 생각도 없이 그냥 하는 게 좋았다. 서로 그게 편했다.


유난히 무기력했던 어느 날 나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퇴근시간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복통과 함께 열까지 났다. 먹었던 밥도 전부 게워내고 버티다 못해 결국 조퇴를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집으로 향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현관을 열었다. 터덜터덜 신발을 벗고 침대 쪽으로 몸을 옮기자 무엇인가 내 침대 위에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니 익숙한 침대의 삐걱 거림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와 다른 사람이 한대 뒤엉켜 땀을 짜내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인 엉덩이 두 개는 연신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나는 힘겨운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나가!"


그렇게 나는 고함을 치며 기절했다. 이후 눈을 떴을 때 나는 현관 앞에 쓰러져 있었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도 누군가는 내 곁에 없었다.






[5장, 방]

나는 괴성을 지르며 벽을 치다가 쓰러졌다. 양손으로 벽을 짚고 누군가의 사진을 응시했다. 사진 속 누군가는 행복해 보였다.


"제발, 여기서 꺼내 주세요."


내 목소리가 꺼지자 정적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귀에선 이명 소리가 들려왔다. 삐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목이 메고 콧물이 범벅이 되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눈물과 콧물이 바닥으로 줄기차게 떨어졌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끄윽 또는 꺼억 거리며 계속해서 오열했다. 그리고 빌며 외쳤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6장, 밖]

한동안 출퇴근을 제외하고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도 바꾸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 무렵에 누군가가 집 앞에 있었다. 나는 놀라지도 않았고, 아주 태연하게 지나쳐 비밀번호를 누르고 내 집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보지도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세 달이 더 흘렀다. 유독 비가 심하게 내리던 어느 날 밤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마치 주변에 있는 것 같아 여러 번 뒤를 돌아봤다. 또는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 집에 다다를 때까지 기대하기도 했다. 혹여 집 안에 있지 않을까. 혹시에 만약을 거듭하니 사람이 미쳐갔다. 누군가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불빛도 지나가는 닮은 사람들도 모두 저주스러웠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했다. 누군가를 잊어갔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출퇴근을 반복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을 향하는 나는 낮잠이 매우 필요했다. 너무 피곤했다. 문을 열고 불도 키지 않고 침대로 향했다. 옷만 대충 벗어던지고 침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악!"


무언가의 비명 소리에 나는 침대 밖으로 펄쩍 뛰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도 나는 악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당장 안고 싶기도 했고, 나가라고 하고 싶기도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귀가 뜨거웠고, 손이 떨렸다. 나는 복식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밥은."


이내 불을 켜고 냉장고를 열었다. 건강한 도시락 두 개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 동안 가열했다. 위이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멍하니 보며 지금 상황을 정리했다. 반년 만에 누군가가 돌아왔다. 아니, 나타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잘 지냈냐는 너무 식상하다. 화를 내기에는 시기를 놓쳤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 하다 보니 작동이 끝난 전자레인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시락을 꺼내고 식탁에 올려둔 뒤 누군가를 불렀다. 누군가는 대꾸 없이 내 앞에 와 앉았다. 그리고 둘 다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꾸역꾸역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반년 동안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그렇게 먹기만 하다가 누군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잘 지냈어?"


식상한 질문이 좋았다.


"아니."


"미안해."


"뭐가."


"그냥."


무엇이 미안한지 정확하게 듣고 싶었다. 허락도 없이 내 집에 들어온 게 미안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몸을 섞었다는 게 미안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쓰러진 나를 버려두고 간 것에 대해선지. 어떤 것이 미안한지 너무나 알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무엇이 미안하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 그냥이라면 그것은 미안한 게 아니다. 누군가는 너무도 단호하게 '그냥.'이라고 했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정말 그냥이었다. 그저 그냥일 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그냥.






[7장, 방]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은 건지. 잠을 자긴 했는지, 아니면 눈만 감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본적인 인지 능력이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진이 붙어있는 벽을 응시했다. 그런데, 옆에 사진이 한 장 더 붙어있었다. 놀란 나는 허겁지겁 벽 쪽으로 달려갔다. 새로운 사진에는 고개가 45도쯤 돌아간 상태의 누군가가 있었다. 볼이 빨개져 있었고, 입술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화가 났다. 어떤 정신병자가 누군가와 나를 납치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다. 이 방에는 어떤 장치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정신이 나갈 때마다 납치범이 사진을 붙이고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사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손바닥으로 다시금 벽면을 눌러보았다.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모든 곳을 빈 곳 없이 천천히 눌렀다. 그리고 바닥을 기며 눌러댔다. 그러나 어떤 기관장 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를 이곳에 가둔 자식은 사이코패스가 분명했다. 정신병자 살인마일 수도 있다. 혹은 미친 과학자, 불법 정부기관, 식인을 하는 중국인 등 온갖 부정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더 이상 소리 지를 힘도 없었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말했다.


"불 꺼..."






[8장, 밖]

나는 다시금 누군가와 몸을 섞었다. 그러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원래도 그런 사이였지만, 더욱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제는 친구보다 못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웃기게도 우리는 남보다는 가깝고 친구라기에는 먼 사이였다. 하루는 일을 하고, 낮잠을 자고, 누군가와 몸을 섞었다. 이 역겨운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했다. 내 집에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전화를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너에게 나는 무엇이며, 우리는 무슨 관계냐고. 그러자 누군가는 경멸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랑 무슨 사이가 되고 싶은데."


누군가는 마치 벌레라도 본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멀어졌다. 누군가는 그대로 돌아서서 내 집을 나가려 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곧장 누군가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뒷목을 잡았다. 누군가는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를 질렀다. 비명에 놀란 나는 누군가의 뒷목을 더욱 강하게 잡고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순간 적막해진 방 안에선 누군가의 간헐적인 기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9장, 방]

또 정신을 잃었다. 이 공간은 나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벽에 붙어있는 누군가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장에서 종이가 살랑이며 떨어졌다. 내 눈앞을 스칠 때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장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천장이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였다. 그렇지만, 도저히 천장을 닿을 방법이 없었다. 강제적으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고개를 떨구고 떨어진 종이를 응시했다. 종이에는 어떤 글이 적혀 있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쭈그려 앉아야 했다. 가까이서 본 종이에는 [기억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종이를 낚아챈 후 다시 일어났다.


"뭘, 기억하라는 거야."


도저히 무엇을 기억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종이를 구기며 누군가의 사진이 붙어있는 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벽에 붙어있어야 할 누군가의 사진이 사라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쪽의 벽을 살폈다. 이내 몸통 전체를 돌리며 사방에 있는 벽을 훑었다. 방금까지 붙어있던 사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상태로 미끄러지듯 앉았다.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줄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이곳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천장을 보며 포효하는, 지면에 머리를 세차게 박는, 주먹으로 벽을 마구 치는, 충동적인 감정이 샘솟았다. 폭력적인 상상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상기했다. 결국 나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양손을 바닥에 댔다. 곧이어 머리를 낙하시킬 마음을 먹고 눈을 번쩍 떴다. 그때 눈앞에 누군가의 사진이 나타났다. 안면이 으스러져 피가 흥건한 누군가의 얼굴은 끔찍했다.






[10장, 밖]

"어떻게 했냐고 이 정신병자 새끼야!"


"몰라요...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쇼하고 있네 이 미친 새끼가. 빨리 말 안 해?"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정말입니다."






[11장, 방]

사진 속에 있는 누군가의 새하얀 얼굴에는 온통 검은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그 뭉개진 얼굴을 보고 있자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다른 사람이 한데 엉켜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누군가의 뺨을 갈겼던 영상이 눈앞에 선명했다. 곧이어 나는 누군가의 숨을 멎게 한 시간대로 이동됐다. [야. 너한테 난 뭐야? 이게 무슨 관계냐고.] 나의 눈앞에 광기 어린 표정으로 호소하는 또 다른 내가 보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곧장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래서, 나랑 무슨 사이가 되고 싶은데.] 말을 끝낸 누군가가 돌아섰다. 나는 재빨리 뛰어가 나를 말리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얼마 후 둔탁한 소리가 났고,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후 마치 못을 박는 듯 쿵쿵쿵하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잠시 후 둔탁한 소리가 멎었음에도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 참상을 목도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때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와 함께 섬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봐."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누군가의 으깨진 얼굴이 코앞에 나타났다. 누군가의 눈은 뭉개진 얼굴 속에서도 빛났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양손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이마와 이마를 맞대었다. 누군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주시했다. 나는 이마를 떼어내며 누군가에게 말했다.


"미안해."


누군가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누군가의 입 앞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러자 오히려 의식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누군가는 여전히 코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손 닿을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내 몸 또한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정신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나를 잡아당겼다. 그 불가항력의 힘에 나는 조금도 버티지 못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다시 녹색의 저주가 시작됐다.






[12장, 밖]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형사의 말에 의하면, 나는 누군가를 죽였고 시체를 유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첫 번째로 나는 누군가를 죽일 이유가 없다. 더욱이 내겐 차도 없고, 평소 행동반경도 좁았다. 즉 내가 사람을 죽이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유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형사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형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야, 내가 너 같은 정신병자 상대하는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형사님, 제가 마법사도 아니고 어떻게 시체를 그렇게 쉽게 유기합니까."


"네 집에서 발견된 혈흔 자국만 해도!"


형사는 내 멱살을 잡았다. 형사는 욱하는 분노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입고 있던 옷 그리고 집 곳곳에 피해자의 혈흔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 뭐가 더 필요해?"






[13장, 방]

다시 눈을 떴을 땐 녹색 방이었다.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다. 그리고 죽였다. 비뚤어진 욕망이 누군가를 앗아갔다. 나는 괴물이 분명했다. 어떻게, 어떻게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가 있나. 절대 그래서는 안됐다. 절대로. 결단코. 한사코! 그때 다시금 방 전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랑 무슨 사이가 되고 싶은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걸어가는 나를 뒤에서 잡았다. 흠칫하고 놀란 나는 나를 응시했다. 나는 분명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다. 악의에 가득 찬 그 역겨운 눈은 내가 아니었다. 당장 누구든 죽이려 하는 그 몸짓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의 몸을 싸잡고 식탁으로 내던졌다. 순간 나는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기었다. 나는 시간을 주지 않고 발로 나의 머리를 가격했다. 내 머리는 식탁 다리에 부딪쳐 유혈이 낭자했다. 이것으로 끝내면 안 됐다. 나는 내 머리를 밟았다. 밟고 또 밟았다. 수박처럼 으깨진 머리를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나는 다 터진 나를 뒤로 하고 침대로 향했다. 능숙하게 배게 맡에 있는 책을 꺼냈다. 곧이어 책을 감싸 안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틀렸나.' 책은 기다렸다는 듯이 녹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곧이어 푸른색 연기로 방 안이 가득 찼다. 점차 졸음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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