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두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의 지시 없이 멈춰진 몸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목 언저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내 시선은 신발 끝을 향해 있었지만, 초점이 흐려져 아무것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누구지.'
굵고 낮은 한 서린 음성에 흠칫 놀라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내게 말을 걸 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당황한 채로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는 다르게 내 걸음은 신속하지 않았다. 몇 백번은 다닌 귀가 길인데도 새삼 달라 보였고, 낯설었다. 주변 풍경을 더듬으며 나아가는 수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시야에 걸쳐지는 건물은 대부분 이상한 구조의 일, 이층 건물이었다. 주택인지 상가인지 알 수 없는 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 그리고 시대에 뒤처진 투박한 빨간색 벽돌과 엉성한 마감처리는 알 수 없는 정감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주변을 탐색하며 걷다 보니 가장 이상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층이라고 하기엔 낮고, 반지하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높았다.
두 다리는 반의 반 지하쯤 되어 보이는 그 집으로 나를 인도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건물의 형체가 선명해졌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은 색이 존재하지 않았다. 1900년 초중반 개발도상국 시절에 지어진 것 같은 건물의 생김새는 내부가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흑백 사진과도 같은 집의 내부는 옷 뭉텅이와 어떤 물건의 상자들로 문 앞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는 염탐에 온 신경을 쏟은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자 또다시 분노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자.'
다시금 들려온 목소리에 경직된 두 다리는 장난감 병정처럼 삐걱 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결국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정말 미친 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를 생각하며 양손으로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돌아버린 정신을 다잡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고, 정면을 응시하며 걸었다.
근래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악재만이 되풀이되었다. 때문에 신체와 심리 모두에 극심한 긴장 상태가 유지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환청이 들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정상적으로 뇌에 전달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어떠한 일을 해도 즐겁지 않았기에 성취감 또한 없었다. 나는 뿌리가 잘린 생기 없는 꽃처럼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다시 생기를 찾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도 만났으나 모두 허사였다. 결국 뿌리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흡수할 수 없었고, 내재된 절망 또한 뱉어낼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부단히 노력하며 마지막을 향해 뛰지도 못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오전]
나는 번거롭고 귀찮은 타인들을 주변에 두는 일이 야근보다 싫다. 회사 일만 해도 지치는데, 타인들의 같잖은 언사를 듣는 것은 너무 큰 고역이었다. 때문에 회사 동료들 또한 내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일 이야기가 아니라면 최대한 말도 걸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편이 좋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죽이기엔 내 청춘은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근래에는 정도가 지나치다. 유일하게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는 과장님마저 냉랭해졌고, 나에게는 어떤 업무도 지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입사원조차 나를 무시했는다. 타일러 보기도 하고 언성을 높이며 겁도 줘 봤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반쯤 벌린 상태로 신입의 뒤통수를 하염없이 노려 보기 일쑤였다.
신입의 깔끔한 뒷머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가려 몸을 틀자, 갑작스레 손과 발이 저렸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듯했다. 더욱이 누군가 내 심장을 아주 강하게 움켜쥔 것과 같은 압박에 무릎을 꿇었다. 곧이어 내 이마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숨이 가빠졌고 눈과 코 그리고 입에서는 액체들이 줄줄 흘렀다.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끅끅 거리는 소리만 나올 뿐 어떤 단어도 뱉어낼 수 없었다. 새우처럼 말린 몸은 기이하게 뒤틀렸고 극심한 통증에 결국 정신을 잃었다.
"과장님 두물 상사에서 재고를 처리할 수가 없다는데요."
"그래서, 이번 분기는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거야?"
회사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신이 들었다.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워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병원이 아닌, 아까 쓰러진 회사 바닥에서 그대로 깨어난 게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영화 속 시한부 판정을 받은 주인공처럼 사무실 한복판에서 남우주연상에 버금가는 심장발작 열연을 펼쳤음에도 그 누구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나를 덩그러니 두고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 등을 벽에 기댄 상태로 천천히 일어났다. 쓰러진 여파로 인해 힘 빠진 다리는 정상 작동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치욕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발을 질질 끌며 무관심의 가시덩굴을 헤쳐 겨우겨우 화장실로 도피했다.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세면대 앞에 섰다. 이내 수도꼭지를 틀어 가장 차가운 물로 미친 듯이 세수를 했다. 나는 모든 것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물질을 멈추고 양 팔로 세면대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그러자 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거울을 봐.'
"그만!"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더 이상은 이 미친 환청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세면대를 두어 번 더 내려치며 오열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그동안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 회상하며 한숨을 뱉어냈다. 그러자 심장이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심장을 조여 오는 압박감과 동시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엄청난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거울을 봐.'
쓰러지기 직전 한 팔로 세면대를 붙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리에 보냈다. 이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으나,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하얗게 지워졌다. 텅 빈 거울을 응시하자 섬뜩한 정적이 나를 감쌌다. 점차 거울의 내부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또 모든 빛이 한 점으로 모였다. 사방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거울은 나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정신이 망가지는 듯한 아찔한 느낌과 동시에 인위적이고도, 일정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그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한 점으로 사라졌던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퍼져 여러 개의 빛이 되었다. 이후 눈을 떴으나, 모든 게 흐릿했다. 누군가 나를 부축하며 이렇게 말했다. '눈 뜨세요. 주무시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