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다이아를 처음 만난 곳은 토론 모임이었다. 그날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이아를 제외한 나머지가 빛에 산화되어 사라졌다. 내 시야에는 노란색 반팔을 입은 다이아만이 선명했다. 그리고 다이아의 뒤에는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후광이 존재했다. 분명 첫눈에 반한 것이다. 그렇게 다이아와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잘하지 않는 연락도 먼저 했다. 관심 없는 것을 좋아하는 척도 했다. 일부러 이성 친구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다이아에게 보다 더 살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달이 지나는 동안 나와 다이아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때문에 누군가 다이아를 채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다. 어쩔 수 없이 빠른 시일 안에 용기를 내야만 했다.
하루는 모임에서 뒤풀이가 끝난 후 노래방을 가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다이아는 여럿이 노래방 가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다른 사람들이 노래방으로 사라지면 다이아에게 집에 바래다주겠다며 수작을 부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술을 꽤나 마신 다이아도 흥이 돋았는지 노래방을 가겠다고 수락을 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노래방으로 향했다. 나는 노래방에 가서도 계속 다이아만을 유심히 관찰했다. 다이아는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과음한 듯 보였다. 여기서 더 놀았다가는 다음 날 크게 힘들어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때, 나도 따라나섰다. 그리고 조금 비틀거리는 다이아에게 말을 건넸다.
"집에 데려다줄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다이아를 보고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취한 것 같아서. 괜찮으면, 집에 같이 갈까 해서 물었어. 밤도 늦었고."
실패의 기류가 느껴졌다. 그러자 나는 더욱 횡설수설했다. 다이아는 그런 나를 깊게 응시했다. 나 또한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고, 다이아와 눈을 맞췄다. 이내 다이아의 입에선 긍정의 답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모임 사람들을 버려둔 채 단 둘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어두운 길 다이아는 양손으로 내 팔을 꼭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중심 잡기가 힘들어서."
건조하고 담백한 다이아의 말에 내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어쩌면 오늘 여자 친구가 생길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노래방에서부터 다이아의 집 까지는 무려 30분의 시간이 존재했으나, 나는 고백에 가까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팔짱을 낀 상태로 30분을 같이 걸으며 용기 내서 던진 말들은 전부 단편 소설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예술가적 관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주인공의 방화는 옳은가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이것은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나는 다이아를 집 앞까지 배웅한 후 엄청난 자괴감에 큰 한숨을 뱉으며 쓸쓸하게 돌아섰다. 막차가 끊긴 시간 택시비도 없어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울함을 숙성하고 있을 때 마침 다이아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나 아직, 역이야."
"잠깐 기다려, 나갈게."
바래다준 집에서 도로 튀어나온 다이아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덤덤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나에게는 태도를 똑바로 하라며 일침을 가했다. 이제는 말해야 했다. 이렇게, 직접 떠먹여 주는데 입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맞잡게 되었다.
[초반]
약속을 어기는 게 끔찍이도 싫었던 나는 다이아에게 여러 번 실망했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나는 행동과, 약속 자체를 잊는 소홀함에 치를 떨었다. 심지어는 이중 약속으로 선약이었던 나와의 약속을 깨는 무심한 결단력에 결국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사실 그중 몇 번 의 일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이아는 유능했고, 유능한 사람은 바쁘기 마련이다. 본인의 경력란에 한 줄, 어쩌면 몇 줄 더 추가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이성적인 사고를 했을 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으나, 감정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다이아가 가장 무서워하는 무표정을 지었고,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시위를 했다. 눈물을 멈출 수 없는 병에 걸린 다이아는 매 번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쏟아냈으나, 굳게 닫힌 나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남들처럼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일이 어려웠다. 더욱이 눈물이 수도꼭지를 돌린 것처럼 흐르는 사람에게 짜증을 내며 미주알고주알 서운함을 표시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입을 닫는 수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힘겹게, 힘겹게 입을 열어봤자 독사같이 비꼬는 말이 튀어나올 게 자명했기에, 진퇴양난의 연속이었다.
다이아가 바빠질 때마다 우리는 같은 이유로 매번 크게 다투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비꼬는 말로 다이아의 숨통을 조였다. 결국 나는 다이아가 이별을 고하게 만들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택시비 십만 원을 태워 다이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떨리는 손 발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어떻게 설득할지를 고민했다. 이후 나타난 다이아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손을 잡자 이러지 말라며 매몰차게 뿌리쳤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지만, 당장 이 상황을 타계해야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수 분의 설득 끝에 결국 헤어지는 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 없던 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재회 후 나는 허탈감에 빠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반면 다이아는 기분 좋은 일의 연속이었다. 어떤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이아는 계획을 같이 주도했던 인원들과 함께 뒤풀이를 했다. 다이아는 뒤풀이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금방 파할 것이라며 나와의 저녁을 약속했다. 나는 다이아를 만날 생각에 마냥 신나 다이아의 뒤풀이 장소 근처의 카페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다. 기다리며 무엇을 할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재밌는 일이 있었는지를 검토했다. 나름 즐거운 기다림을 이어가던 중 다이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뒤풀이 장소에서 잠깐 나온 다이아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놀다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더 놀고 싶다는 이유였다. 나는 덤덤하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다이아의 귀가 소식을 듣기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결국 아침이 다 되어서야 '이제 집에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나는 다이아를 만날 때면 호흡이 가빠졌고, 간헐적으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 겪었던 공황발작의 전조증상이었다. 다이아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과, 다이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감정이 미친 듯이 대립했다.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도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연소했다.
[중반]
억지로 안정기에 접어든 우리는 서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듯 보였다.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고, 화가 나도 웃어넘겼다. 그렇게 나에게 권태기가 찾아왔다.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매 순간 다이아를 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다이아와 만나면 행복하면서, 불행했고, 안정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샘솟았고, 나 또 한 다이아를 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일렁였다. 한 번 끊어진 관계는 쉽게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게 지쳐있던 나에게 다이아의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장문의 문자였는데, 요약하자면 만나지 말라는 것에 가까웠다. 만나는 날짜와 횟수를 조정하려 했고, 장소마저 간섭했다. 그리고 입에 담기 민망한 관계의 장소와 횟수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뱉어냈다. 나는 모멸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다이아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별 후 혼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과연 나는 다이아 없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었다. 물론, 당장의 감정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만이 되풀이되었다. 그렇게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을 때쯤 다이아가 찾아왔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자신을 놓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절대로 뿌리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보석같이 소중했고,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후반]
점점 성장하는 다이아를 보고 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항상 제자리걸음인 내가 한심했다. 여러 가지 재능을 그저 썩히기만 하는 내가 훨훨 날아가야 할 다이아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쓸데없는 감정싸움을 유발했고, 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비꼬는 말을 다시금 내뱉었다. 매 시간 성장해도 모자를 시기에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정체되어 있었다. 어느샌가 책도 읽지 않았고, 글도 쓰지 않았다. 그림은 아주 가끔씩 그렸고, 운동도 간헐적으로 하기 일쑤였다. 내가 잘하고 재능 있는 모든 것을 발전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남은 내 유일한 무기였던 사랑마저도, 희미해져만 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잡던 손을 놓았고, 같이 걷던 길을 떠나 각자의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끝]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운동도 더 열심히 했고, 그림도 미친 듯이 그렸다. 그렇게 사파이어를 만났다.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게 어떤 말인지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사파이어를 제외한 모두가 빛에 산화되어...
소설가 박진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