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권
초등학생 때 내게는 휴대전화도, 컴퓨터도 없었기에 말로 하는 약속이 중요했다. 주말 아침마다 나를 깨운 것은 고대하던 약속의 소리였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 후 팔짱을 끼고 그 소리를 기다렸다. 명확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전에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말이다.
"야 ~ 놀 자 ~"
약속의 소리가 들려온 직후 나는 문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기다리지 않은 것처럼 귀찮은 듯 천천히 문을 열었다. 주말 아침의 설레는 냄새가 콧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행복을 만끽하며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여유롭게 계단을 내려갔다. 한 아이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핀잔을 주고는 다른 아이들을 부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대 여섯 명을 모아 인근에 있는 아파트의 놀이터로 향했다. 우리는 경찰과 도둑, 숨바꼭질, 술래잡기를 주로 했는데, 이 중에서 한 발 술래잡기를 가장 많이 했다. 술래는 기구에서는 두 발, 그리고 기구가 아닌 지면에서는 한 발로 뛰어야 했고, 얼음이 없다는 파격적인 규칙이 있었다. 때문에 넓은 놀이터보다는 좁은 놀이터가 더 재밌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때 놀이터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아이가 있었다. 멀리서 본 아이는 혼자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 자세히 보니 아이는 얼마 전 전학 온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던 나는 처량하게 앉아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야, 같이 놀래?"
"... 나?"
"그래, 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딱 봐도 허약해 보이는 아이는 술래일 때는 아무도 잡지 못했고, 술래가 아닐 땐 너무나도 쉽게 잡혔다. 덕분에 놀이의 균형이 맞지 않자 다른 아이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불평의 속 뜻은 결국 '쟤 빼고 우리끼리 놀자.'였지만 나는 오기를 부리며 동의하지 않았다.
"넌 그냥 바닥에서도 두 발로 뛰어."
그러나 허약이는 여전히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일부러 잡혀준 뒤 다른 친구를 술래로 만들어도 결국에는 허약이가 다시 술래가 되었다. 같은 행동이 반복될수록 재미는 반감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아이들의 불만의 소리는 높아져만 갔고, 허약이는 주눅이 들어 서서히 우리들에게서 멀어졌다. 나의 괜한 오지랖 때문에 허약이를 놀이터에서 밀어낸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마주친 허약이에게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허약이는 우물쭈물 인사를 받아주지 않은 채 눈을 피했다. 허약이는 몸만 약한 게 아니라 성격도 대단히 소심했다. 한 번은 국어 수업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낭독하는 시간에, 허약이는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활자를 읽기 시작했다. 답답했던 선생님은 들리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목소리를 높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허약이는 되려 입을 꾹 닫아버렸다. 선생님은 다시 읽을 것을 권유했지만, 허약이는 결국 선 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황한 선생님은 자리에 앉으라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허약이는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해서 울었고, 결국 선생님의 손을 잡고 반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허약이에게는 여러 가지 별명이 생겼다. 약골, 울보, 똥쟁이 등 모든 나쁜 말들은 전부 허약이를 지칭하게 되었다. 허약이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고, 학교를 나오지 않는 날이 늘어만 갔다.
어느 주말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한 발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는데, 어느새 허약이가 놀이터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허약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야, 같이 놀래?"
그러나 허약이는 거절했다. 자신은 잘하지도 못하고, 그냥 보기만 해도 재밌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술래잡기 말고 경찰과 도둑 하자. 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야. 빨리 와."
내가 만든 경찰과 도둑은 경찰이 뒤돌아서 30초를 세고 도둑은 그 시간 동안 최대한 멀리 도망친 후 숨으면 됐고, 발각되는 즉시 체포되는 놀이였다. 때문에 허약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속적인 움직임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딱 한 번만 뛰어서 숨으면 끝인 놀이였으니까. 아이들은 나의 독단적인 행동에 난감해했지만 그래도 별말 없이 따라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보다 재밌게 놀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예상대로 잘 숨기만 하면 되는 놀이였기에 허약이에게 고정적으로 도둑만 시켜주면 될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 또한 고맙게도 허약이와 잘 놀아주었다.
허기질 무렵 우리는 마지막 놀이를 약속했다. 경찰인 아이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허약이와 나는 같은 장소에 숨게 되었다. 그 장소는 아파트 지하층에 있는 허름한 창고였는데, 대낮에도 빛이 들지 않아 내가 자주 숨는 장소였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장소였으나, 우리는 분명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뭘 봐."
"안 보이는데..."
"보고 있잖아. 바보야."
"히히..."
"야, 우리 오락실 갈래?"
"응?"
나는 당황한 허약이의 얇은 손목을 잡고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출구인 아파트 후문으로 향했고, 맞은편에 있는 오락실로 내달렸다. 허약이는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숨 넘어갈 듯 웃으며 비틀 거리는 다리로 나를 쫓아왔다. 나는 허약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후 오락실 문을 활짝 열었다. 내부의 오락기는 문방구 앞에 있는 조그만 오락기 몇 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많았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번쩍이는 오락기들은 웅장했다. 한 번도 해보지 못 한 오락도 많았다. 어른들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백 원짜리 오락기들도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백 원짜리 오락기 앞에 앉았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른 채 오락에 열중했다. 한참을 오락에 빠져 있던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오락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분식집으로 향했다. 나는 새빨간 떡볶이와 황금빛의 오징어 튀김 세 개와 계란 튀김 세 개를 주문했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허약을 보며 말했다.
"야, 넌 왜 주문 안 해?"
"응? 그거 너 혼자 다 먹을 거야?"
크게 놀란 허약이는 어리둥절하며 새카만 짜장 떡볶이와 계란 튀김 한 개를 주문했다. 분식집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는 입에 있던 음식을 채 삼키지도 못한 채로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는 허약이에게 다음에 또 놀자는 말을 남기곤, 재빠르게 뛰어갔다. 달려가며 뒤를 돌아보니, 허약이는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보답으로 짧게 손을 흔들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허약이와 나는 하교를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왕사탕을 자주 사 먹었다. 이 왕사탕은 무려 삼십 분을 빨아야 껌이 나타났는데, 껌은 별로 맛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무지막지한 사탕이었다. 문방구에는 더 맛있는 맥주 사탕도 있었고, 톡톡 튀는 발가락 사탕도 있었지만 허약이는 항상 입천장이 다 까지는 왕사탕만을 고집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번 왕사탕을 물고서 오락실로 향했다. 허약이와 나는 항상 '스노우 브라더스'라는 눈사람 오락을 가장 먼저 했고 이어서 블록을 부수는 오락 '붐버맨'을 두 번째로 했다. 그리고 '1945'라는 2차 세계 대전이 배경인 비행기 오락으로 마무리했다. 혼자 하는 게 서툴러 한 번도 끝판을 보지 못했던 허약이는 늘 함께하는 오락만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혼자 하는 게임을 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허약이는 침울해했고, 나는 조금씩 불만이 쌓여갔다.
그렇게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은 모든 게 이상했다. 허약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게 왕사탕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매번 같은 오락만을 하는 게 질려서인지 조금 심통이 나있었다. 풀이 죽은 허약이는 오락실까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딱히 어떤 말을 던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색한 기류와 함께 오락실에 도착했다. 여전히 어둡고 번쩍이는 오락실의 내부가 우리를 삼켰다. 그날은 유난히 오락실의 냄새가 역했다. 심지어 손 발이 차가워 게임에 집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허약이가 내 눈앞에 왕 사탕을 내밀었다. 순간 울컥한 나는 허약이의 손을 강하게 내리치며 말했다.
"안 먹는다고 했지!"
놀란 허약이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떨어진 사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허약이를 내버려 둔 채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나는 떨리는 몸을 이끌고 안간힘을 쓴 끝에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한 후 씻지도, 먹지도 않은 채 곧장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계속해서 선잠을 지나지 못한 나는 꿈과 현실의 오가며 잠을 설쳤다. 모든 게 뒤죽박죽 섞였다. 도화지같이 하얀 배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면이 넘어가며 어머니가 차가운 손수건을 이마에 올려두었다. 또다시 누군가 하얀 배경을 검은색으로 마구 칠하기 시작했다. 그 형상이 너무도 날카로워 나는 몸을 비틀었고,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 했다. 그러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나를 감싸 안았고,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
전 날 너무 앓았던 탓인지 입 안에 수십 개의 돌기들이 돋아났다. 나는 어머니에게 밥을 먹지 못하겠다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엄청난 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들, 남자는 강해야 한다. 고작 감기 따위로 밥을 못 먹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잘 먹어야 빨리 낫지.] 하며 두 번째 공기를 내 앞에 투척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밥을 다 삼킨 나는 세 번째 공기가 나타나기 전에 재빠르게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 잊고 있던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허약이의 손을 뿌리치고, 소리 질렀던 일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나는 후회하며 한숨을 쉬었고, 오늘 꼭 사과를 하겠노라 다짐하며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허약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지나도 허약이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는 허약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처음 겪어본 먹먹함에 눈물도 흘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