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하... 세탁기를 사든가 해야지."
수북이 쌓인 세탁물을 보니 귀찮음이 밀려왔다. 하필이면 세찬 비가 내리는 날 빨랫감이 임계치에 달했다. 어쩔 수 없이 당장 세탁을 해야만 했다. 게으름을 뒤로하고 분주히 움직였다. 대형 부직포 가방에는 옷과 수건을 담고, 작은 봉투에는 양말과 속옷을 담았다. 오래 묵혀둔 빨랫감은 생각 이상으로 묵직했다. 더욱이 우산까지 써야 했다. 좋지 않은 시력에 혹여라도 넘어질까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크게 한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옥탑방에서, 이 무거운 짐을 들고 내려가자니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성인의 발 사이즈보다 폭이 좁은 계단은 위험천만했다. 나는 발과 계단에 온 신경을 다하며 힘겹게 내려가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꼭 미리미리 빨래를 하리라는 다짐을 말이다. 계단을 다 내려왔지만, 섣불리 공동현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빗줄기가 너무 굵었다. 셀프 세탁소는 집에서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저 빗줄기를 뚫고 걸어간다면 30분은 족히 걸릴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빗 방울이 조금 약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는 비를 멍하게 보고 있자니, 문득 그와의 다툼이 떠올랐다.
[연애]
"진짜 이럴 거야?"
"내가 뭘."
"내가 잘못했니? 네가 늦었잖아. 그래서 몇 마디 한 걸로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거야?"
"아, 그래. 내가 미안하다, 미안해! 대체 몇 번을 사과해야 돼?"
"아까 했으면 이렇게까지 싸우지도 않았잖아..."
"그래, 그래 또 내가 다 잘못했지. 항상 넌 옳고, 나는 틀렸으니까."
그는 매번 이런 식으로 내게 등을 돌렸다. 나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채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자주 어기거나 지각을 일삼았다. 그것에 나는 타이르기도 하고 화도 내보았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나는 시간 약속에 예민했기 때문에 연애 초반에는 오 분, 십 분 늦는 것에도 과민 반응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미안해하는 그를 보면 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어느새부턴가 몇 분 늦는 것은 데이트의 통과의례가 되어 있었다.
한 번은 예약하기 어려운 맛집을 겨우겨우 예약한 후 먼저 가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식당은 식사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그에게 여러 번 당부의 말을 했다. 그는 이번에는 절대 늦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게도 늦었고, 나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가게를 나와야만 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화를 냈다. 그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야... 내가 늦는 거 한 두 번이야?"
그렇게 끊긴 전화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후 전화를 몇 번 더 하고, 문자도 해봤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점점 불안해졌다. 겨우 조금 늦은 것 가지고 화를 낸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늦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사람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그러자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우리 시간 좀 갖자.]
[출발]
굵은 빗방울이 옅어질 때쯤 생각의 파도도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빨랫감을 양손으로 들고 우산까지 펼쳐 든 후 밖으로 나섰다. 비는 아까보다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나웠다. 매서운 빗줄기를 뚫고 셀프 세탁소까지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바지가 다 젖을 때쯤 높은 오르막길이 나왔다. 그곳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면 당연하게도 올라간 만큼의 내리막길이 나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내려오면 삼거리가 나타났다. 그렇게 머리부터 목까지만 보호해주는 우산 때문에 비를 추적추적 다 맞으며, 한참 동안 바뀌지 않을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다. 나는 쏜살같이 달아나는 차들을 멍하게 바라보며 또 다른 생각에 잠겼다.
[회사]
"아직도 우리 회사의 색을 몰라? 이건 우리 회사 느낌이 아니라고. 다시 해!"
디자인 회사에 취업한지도 일 년이 넘어갔지만, 나는 아직 사원도 되지 못한 인턴이었다. 6개월이면 정직원으로 전환시켜준다는 사장의 말에 속아 벌써 일 년 육 개월을 허비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수의 추상적인 의뢰였다. 물론 디자인이라는 게 조금은 추상적일 수 있지만, 그래도 틀은 알려 주어야 한다. 백지에 점 하나 찍는 게 예술이라지만, 디자인은 명확한 목표가 있다. 내게 디자인은 먹고살기 위한 일이지 예술이 아녔으니까.
"그 뭐랄까, 좀 파랗고... 음, 좀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는... 그런 거 있잖아!"
사수의 말에 정신이 반쯤 날아갈 무렵 사장의 호출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뻔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힘든 일은 없는지에 대해서 물었고,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표현했다. 그리고 곧 정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사기를 마무리로 내 귀중한 한 시간이 허비되었다. 5인 미만의 사업장인지라,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해도 따로 받을 수 있는 수당은 없었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해 이직할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저 가기 싫은 길을 터벅터벅 감내하며 걸어 나가야만 했다.
[이동]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자 사람들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기억의 잔상들을 지우고 다시금 걸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친구와 자주 가던 아담한 개인 카페가 나타난다. 그곳 옆에 셀프 세탁소가 위치해 있다. 그러나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각의 파도에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무거운 빨랫감 덕분에 팔뚝의 통증은 최고점에 달했고, 단련되지 않은 허벅지의 근육도 비명을 질렀다. 머리만 간신히 막아주던 우산도 점점 앞으로 기울어져 마지막 남은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머리도 무거워져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질 때쯤 카페가 나타났다. 나는 짐을 잠시 내려놓고, 카페 안을 응시했다. 혹여라도 친구가 있을지도 모른 생각에 내부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시력 때문에 사람들 틈에서 친구를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카페를 등지고 바로 옆에 있는 세탁소 안으로 들어갔다. 세탁물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잠깐 앉아 숨을 돌렸다.
아직 시작도 못한 세탁을 다 해도 문제였다. 다시금 저 빗줄기를 뚫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찔하고 막막했다. 그때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팔이 아파서였을까, 다리가 아파서였을까. 비에 쫄딱 젖은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눈물이 더 터져 나오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이어 빨랫감을 카트에 싣고, 대용량 드럼세탁기 앞으로 향했다. 세탁기의 문을 열고 가지고 온 빨랫감 전부를 투하했다. 그리고 가장 비싼 4500원짜리 고급 빨래를 선택 후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나는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빨래를 보며 다시금 상념에 빠졌다.
[친구]
나는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물론 그중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적었다. 나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어느 집단에서나 늘 평판이 좋았다. 그렇게 늘 거절 못하는 착한 호구가 되어갔다. 공짜로 자신의 명함을 디자인해달라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급한 사정이 자주 생기는 사람에게 또 50만 원을 빌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대신 거절해주고, 돈을 돌려받아 주는 친구가 있었다. 나에게는 인생 쉽게 사는 열쇠 같은 친구였다. 내가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도와줬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터지고 말았다. 늘 내게 관심을 주고, 쓴소리를 해주던 친구가 더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네 마음대로 살아. 나도 더는 못해먹겠어."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몇 달 동안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지에 대해서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더 이상 상종하기 싫다는 듯한 친구의 굳은 표정에 내 입도 같이 굳어버렸다. 나는 장문의 문자와 편지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욱 연락하기 껄끄러웠다. 나도 자존심이 있었고, 잘못도 없는데 사과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셀프 세탁소]
삐 하는 소리가 세탁방에 울려 퍼졌다. 빨래가 끝났다는 신호음이었다. 상념을 뒤로하고, 다시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탈수까지 끝난 빨랫감을 카트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대용량 건조기 앞으로 이동했다. 건조기 문을 열고 빨랫감을 넣기 시작했다. 빨랫감을 다 넣은 후 문을 닫았다. 건조 온도는 옷들이 상하지 않게 75도로 설정했다. 낮은 온도에도 잘 마를 수 있게 시간은 30분으로 넉넉하게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금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누구에게 전화가 왔는지를 살폈다.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
"그래... 밥은 먹었냐."
"예, 저는 뭐... 식사하셨어요?"
"그만하면 됐다. 이제 내려와라."
"..."
"나도 알고, 네 엄마도 알아. 그만하면 됐어. 이제 내려와."
"네.. 아버지, 제가 지금 바빠서요. 다시 전화드릴게요. 죄송해요."
"... 알겠다. 밥 잘 챙겨 먹고, 아프면 병원 가고... 끊는다."
전화를 끊자 숨겨두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근래 연애도 일도 잘 풀리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도 내게서 등을 돌렸다. 부모님은 나 때문에 늘 하루하루 걱정만 늘어가셨다. 세상 일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온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내게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어떡해야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친구]
"야, 너 뭐해."
단호하지만, 다정함이 묻어있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친구였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나는 친구에게 무작정 사과하며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하냐, 또 물어봐서 미안하다, 고맙다'등 두서없이 말을 무작정 뱉어냈다. 그동안 친구는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표정도 없이 묵묵하게 내 입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몸소 받아주었다.
건조기에서 끝났다는 알림이 울리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흠칫 놀라며 말을 멈췄다. 그제야 친구가 제대로 보였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친구와 함께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빨래 봉투에 담았다.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손만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나도 너한테 도움 많이 받았어."
"응?"
"네가 준 것들도 생각을 해봐. 받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당장은 친구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친구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 옆에서 이렇게 조잘조잘 잘 떠들었던 친구가, 언젠가부터 말을 아끼게 되었다는 걸 인지했다. 그제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친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가 떠올랐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렇지만, 너무도 쉽게 했던 사과들 때문에 지금 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몸 안에 있는 온갖 장기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가는 길]
힘들었던 세탁이 끝난 후, 밖을 보니 어느새 날씨도 맑게 개어있었다. 친구는 도와주겠다며 내 손에서 봉투 하나를 낚아채갔다. 그렇게 우리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러 말들을 주고받았다. 정신없이 이야기 꽃을 피우며 집으로 향하는 길은 너무도 짧았다. 집으로 가는 길과 세탁소를 향했던 길은 같았지만 사뭇 느낌이 달랐다.
친구는 공동현관 앞에서 내게 세탁물을 돌려주며 말했다. '심플하게. 알겠지?'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물기 때문에 여전히 위험한 계단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도감 때문일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나는 일어날 생각도 없이 대자로 누웠다. 그렇게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잠시 밀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만만하고, 당장 했어야 할 일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 좀 갖자고 했잖아."
"아니, 더 이상 시간은 필요 없어. 우리 헤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