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름 여행 6 | 용눈이오름 탐방기
이십 년 전쯤에 제주도 여행 중 김영갑 사진작가의 갤러리 두모악에 갔다. 여행 동선에 있어서 들른 곳이다. 제주도를 사랑한 사진작가라는 것 말고는 크게 아는 건 없었다. 그가 일생을 바쳐 촬영한 사진 속 제주 풍경이 궁금했다.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는 '두모악'에 걸린 사진은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밝게 보정된 아름다운 제주도 관광 사진이 아니었다. 제주의 오름과 중산간의 목가적 풍경이 많았다. 해 뜰 녘의 뿌연 오름 풍경,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본 기억이 난다.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에도 작가는 제주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예쁜 관광지의 제주가 아닌, 숨결이 느껴지는 날 것 그대로의 제주에 내 시선이 묶였다.
사진 속에 불던 바람과 용눈이오름이라는 이름이 그날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용눈이오름은 작가가 가장 사랑했던 피사체였고, 그의 사진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용눈이오름은 부드러운 능선과 억새가 아름다운 곳임을 알게 되었다.
제주 오름 여행을 시작하면서 용눈이오름은 나의 오름 위시리스트에서 늘 상위권을 지켰다. 하지만 오름을 찾아간 것은 불과 2년 전 겨울인 2023년 2월이었다. 딸과 둘이서 찾아간 오름은 안타깝게도 입구가 굳게 잠겨 있었다. 탐방객 증가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된 오름의 회복을 위해 2021년 2월부터 2년간 자연휴식년제가 실시 중이라는 안내가 되어 있었다.
겨울이지만 우리처럼 용눈이오름을 찾아온 몇몇 탐방객들은 이내 발길을 돌렸다. 불과 한 달 뒤부터 탐방로가 다시 개방된다고 한다. 눈앞에서 첫사랑을 만날 기회가 날아간 것 같았다. 많이 아쉬운 마음에 우리는 입구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탐방로 울타리 너머에는 말들이 바람을 맞으며 무심하게 먹이를 먹고 있었다. 오름의 능선과 말을 번갈아가며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왔다.
2년이 지나 이번 가을에 드디어 용눈이오름에 가게 되었다. 10월 중순이니 억새도 윤기 나는 머리를 날리우기 시작할 때다. 그런데 이번에는 날씨가 문제였다. 여행하는 주말 이틀 동안 제주도 일기예보는 계속 비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나마 비 올 확률이 낮은 일요일 오전으로 탐방 일정을 잡아 두었다. 이번에는 용눈이 오름을 제대로 만나고 올 수 있을까?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호텔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은 꾸물꾸물하지만 사람들은 우산 없이 걸어 다니고 있다. 호텔에서 오름까지 운전해 가는 동안에도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그치더니 햇살도 잠시 비친다.
"이제 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읍민속마을을 지나갈 때에는 오히려 폭우가 쏟아진다.
'역시 오늘도 용눈이오름 탐방이 허락되지 않으려나.'
조금씩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그런데 용눈이오름 주차장에 도착하니 마법처럼 비가 뚝 그친다. 정말 다행이다. 설문대 할망께서 정주석에 걸쳐진 정낭을 모두 내리고 대문을 활짝 열어준 기분이다.
오름 입구를 통과한다. 저 멀리 우의를 입고 앞서 오름을 오르는 이들이 보인다. 비는 그쳤지만 세찬 바람은 여전하다. 막 피기 시작한 갈대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야자수매트를 따라 오름을 오른다. 누군가의 손길이 지나간 길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용눈이오름은 경사가 급한 곳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심심하지 않다. 휘어진 길을 따라 시선의 방향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선물로 내어준다. 오름의 갈대에 집중하게 되는 구간도 있고, 멀리 전망을 보게 되는 구간도 있다. 무엇보다 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이 아름답다. 모난 곳 하나 없는 포근한 풍경이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다. 왜 김영갑 작가가 각별히 사랑했던 곳인지 조금 이해가 된다. 그는 용눈이오름의 부드러운 곡선 능선, 겹쳐 나타나는 오묘한 곡선미, 그리고 넓은 초지에 부는 제주의 바람을 특히 사랑했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어느 정도 오르자 분화구가 보인다. 붙어 있는 두세 개의 분화구가 용의 눈처럼 보여 용눈이 오름이라 불린다는 이야기도 있고, 용이 노는 모습을 닮아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자로는 용와악(龍臥岳)이라고 하니 용이 누워있는 모습도 닮았나 보다. 용의 등에 해당하는 능선에 올라서자 일대에서 가장 높은 오름인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파도치는 제주 동쪽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풍력 발전기들이 돌아가고 있다. 흐린 날씨임에도 시계가 꽤 좋은 날이다.
한 번 더 낙타 등처럼 내려갔다가 올라가니 드디어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단체로 올라온 팀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아! 그 풍경 속에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있다. 그 앞에 지미봉, 두산봉, 수산봉 등 여러 오름이 갈대와 구좌 당근밭을 배경으로 봉긋봉긋 올라와 있다. 사람들은 멀리 일출봉과 우도를 한참 바라본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정상 부근에서 탐방로가 막혀 있어서 현재 오름의 둥근 능선을 한 바퀴 돌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정상에서 오름이 보여주는 전망은 말조차 잊은 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올라오는 사람마다 일출봉으로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우리도 앞선 일행과 서로 단체 사진을 찍어 주었다. 덕분에 네 부부가 함께 나온 기념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어제 서귀포올레시장에서 사 온 귤을 까먹으면서 하산한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즐겁게 내려온다. 작은 봉우리를 다시 올라가는 다른 부부의 뒷모습이 보기 좋다. 아예 멈춰 세우고 부부별로 제대로 사진을 찍는다. 평소 같으면 어색해 할 수도 있을 텐데 오늘의 기분과 분위기는 부부마다 한껏 포즈를 잡게 만든다. 아마 용눈이오름의 매력 덕분이 아닐까?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어느 방향으로 바라보아도 아름답고 평화로우니...
오르기 쉬운 편이다 보니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도 올라온다. 조그만 남자아이가 씩씩하게 올라오길래 귀여워서 내 주머니에 있던 망고 젤리 세 개를 쥐어주었다. 한 손에 다 쥐어지지 않아서 두 손으로 받아 들고는 연신 신난 모습을 그 아이의 부모도, 나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별 것 아니지만 용눈이오름을 찾은 오늘이 아이에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한다.
20년 전 두모악 사진에서 시작된 용눈이오름과의 인연이 이루어진 느낌이다. 내려오는 길엔 아직도 억새 위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햇빛을 받고 반짝이는 억새도 아름답지만 오늘 풍경도 충분히 운치 있다. 흐린 가을하늘과 촉촉이 젖은 갈대 풍경이 김영갑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 두모악 갤러리는 예전보다 찾는 이들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화산섬 제주의 자연과 용눈이 오름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아마 김영갑 작가의 사진 속에도 부드러운 오름 능선을 따라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억새는 가을을 일렁이며 그를 추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