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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 어때요?

경주 카페 나들이

by 새벽강

요즘 한국에서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을 넘어선다. 최근에는 빵을 함께 판매하는 '베이커리 카페'나, 전시 공간을 갖춘 ‘갤러리 카페’, 특색 있는 공간과 경험을 제공하는 '테마 카페' 등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카페는 주말이나 휴일에 시간을 내어 찾아가는 나들이의 목적지가 되기도 한다. 특히 대도시 교외와 바닷가 등 유명 관광지에 위치한 '대형 카페'는 이러한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파주, 남양주 등 서울 근교, 기장 등 부산 근교에는 대형 카페들이 즐비하다. 올가을 APEC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천년 고도 경주에도 신라 유적지, 보문호 등지에 대형 카페들이 많다.


한려수도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여수의 대형 카페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즐겨 보았다. 경주 편은 출연진들이 각각 경주의 다른 장소를 먼저 여행한 뒤에 어느 카페에 모여 촬영하였다. 대릉원, 경주월드, 대중음악박물관 등을 다녀온 출연진들이 각자 특유의 입담과 지식을 선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앉아 있는 카페의 넓은 통창 밖으로 왕릉이 보였다. TV를 보면서 궁금했다. 저 카페는 어디일까? 경주에는 큰 고분도 많고, 멋진 카페도 많다. 하지만 카페에서 고분이 내려다보이는 그 한옥 카페가 어디인지는 몰랐다.


몇 해 지나 경주 출장을 마치고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어느 카페에 들렀다. 1층에서 주문하고 2층에 올라가는 순간 알아보았다. 그 사이 카페 이름은 바뀌었지만 여기가 바로 그때 TV 속 카페라는 것을. 왕릉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잠시의 여유를 즐겼다.

그 카페 남쪽에 있는 왕릉은 황남동 고분군의 일부였다. 고분 옆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높이 서 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얼핏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섯 그루이다. 키가 큰 나무와 거대한 고분이 어우러진 이국적인 풍광은 포토존 역할을 톡톡히 한다. 대릉원이나 첨성대 등 인기 있는 곳과는 살짝 거리가 있어서인지 조용한 분위기가 맘에 들어 몇 차례 더 그 카페를 방문했다.


천마총이 내려다보이는 경주 황리단길 카페


그 뒤로 천마총이 내려다보이는 황리단길 카페를 비롯하여 경주 고분군 주위로 더 많은 한옥 카페가 생겼다. 메타세쿼이아가 보이는 고분군의 동편에는 폴바셋이 한옥으로 개업했다. 그리고 고분군의 남쪽에 꽤 큰 규모의 한옥들이 지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경주 나들이를 종종 하는 나는 그곳이 ‘테라로사 경주점’이라는 소식을 일찍 접했다. 강릉 여행을 갔을 때 들렀지만 너무 복잡하여 그냥 돌아왔던 그 테라로사. 내가 좋아하는 경주에, 그것도 황남동 고분군과 바로 이어진 전통 한옥 카페라니 얼른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황남동 고분군 산책로에서 보이는 한옥 카페 전경
카페 실내 풍경


어느 토요일 아침.

“밥 먹고 우리, 커피는 경주 가서 마실까?”

“커피를 굳이 경주까지 가서?”

경주에 내가 봐 둔 한옥 카페가 드디어 문을 열었어!


‘우동 먹으러 삿포로에 간다’는 우스개처럼 어느 주말에 오로지 ‘커피 마시러 경주’에 갔다. 왠지 전통차나 전통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도시, 땅만 파면 문화재가 나온다는 경주에 이 카페는 부지도 매우 넓었다. 문화재 발굴 과정 등 무려 6년 만에 지어졌다는 멋진 전통 한옥이 우리를 맞이한다. 주문을 마치고 마치 불국사 같은 유적지를 구경하듯 한 바퀴 돌아보았다.

건물 사이에 꽁꽁 언 연못을 조심조심 지나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통 가구와 난초 같은 오브제가 클래식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투명한 전통문 창살 너머로 보이는 황남동 고분군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왕릉을 바라보며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커피와 차를 마시니 얼었던 겨울이 풀려 봄이 오는 듯하다.


카페가 문을 열 당시의 겨울 풍경
카페 대청마루를 지나 푸른 고분이 보이는 봄날 풍경


신록의 기운이 생동하는 4월에 또 한 번 방문했다. 봄 날씨가 참 좋았다. 어느새 초록색 잔디옷을 입은 고분군 풍경이 싱그러웠다. 이번에는 마루에 걸터앉아 고분과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햇살도 좋으니 우리 좀 걸어요."

카페 밖으로 돌아 나오니 산책로가 이어진다. 봄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간다. 고분군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키 작은 노란 민들레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피어 있다. 이렇게 여유로운 산책이 얼마만인가!

신라 천년의 역사가 새겨진 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고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교촌마을 입구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살았다는 집터의 우물인 재매정으로 방향을 튼다. 장군이 전쟁터에 나설 때 가족들은 보지 않고 이 우물물을 들이켜고 떠났다지.


월정교 아래를 지나온 남천 시냇물을 따라 걷는다. 시냇가에는 봄바람이 꽃양귀비 붉은 꽃잎을 살랑살랑 흔들더니, 내 코끝도 간질이고 지나간다. 급할 것 하나 없는 천년 고도의 봄길을 중년 부부가 나란히 걸어간다. 데이트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마음은 봉긋한 고분처럼 몽글몽글하다.

아, 봄이다!


월정교와 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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