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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역과 세 평 하늘의 애환

백두대간 협곡열차 V-트레인 여행기 2

by 새벽강


기적의 시골 역

분천역을 출발한 열차가 처음 정차하는 곳은 양원역이다. 양원역은 한국에서 가장 작은 역이다. 외관이 역이라고 하기에는 그냥 시골의 작은 창고 같다. 하지만 영화 <기적>의 실제 배경이 된 역으로, 그 스토리를 알고 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 마을은 도로가 없어 오직 기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그런데 정작 역이 없어 정차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기 위해서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분천역이나 승부역까지 걸어가야 했다. 마땅한 길도 없으니 주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철길 위를 걸어 다녔다. 이로 인해 달려오는 기차에 안타까운 사고들이 이어졌다. 그 동네 한 소년은 무작정 청와대에 편지를 쓰고, 철도청(코레일)에 민원을 넣었지만 번번이 무시당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백 장의 편지를 끊임없이 보낸다. 소년의 끈질긴 노력과 주민들의 간절함이 모여 마침내 역이 들어섰다. 기적처럼 만들어진 작은 양원역. 간절하게 저 역을 만들었던 그 소년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양원역 풍경. 왼쪽 작은 건물이 양원역이다
열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백두대간 협곡 풍경


하늘도 세 평 땅도 세평, 승부역

"협곡 풍경이 정말 아름답네"

"눈까지 내리니 진짜 겨울왕국 같아."

눈 내리는 겨울 협곡을 열차가 달린다. 창 밖은 움직이는 수묵화다. 짙은 소나무숲 위로 하얀 눈이 날린다. 협곡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은 오로지 기찻길뿐이다. 터널과 다리를 지날 때마다 때 묻지 않은 백두대간은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그때마다 열차 안은 감탄으로 채워진다.


다음 정차한 역은 승부역이다.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좁은 협곡 구간이다. 길쭉한 역과 그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 빼고는 다 사방이 산이다. 승부역에서는 무려 10분간 정차한다. 승객들이 서둘러 내린다. 작은 역사 안에 따뜻한 어묵을 팔기 때문이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어묵 국물 냄새가 구수하다.


"어묵과 컵라면 팔아요."

"산나물도 사 가요. 여기서 따서 말린 거 팔아요."

옛날 대전역에서 뜨거운 가락국수를 허겁지겁 먹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구경만 해도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좁디좁은 승부역 플랫폼에 눈발이 더 거세진다. 눈이 많이 오면 운전 걱정부터 하기 마련이지만, 기차를 타고 오니 눈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다.

눈 내리는 승부역 풍경. 플랫폼 옆 건물 안에 어묵과 나물을 팔고 있다

곧 출발한다는 안내에 서둘러 기차에 오른다. 종착역인 철암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협곡 열차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금강소나무 구간이 많지만, 군데군데 하얀 자작나무 숲도 보인다. 석포역을 지날 쯤에는 예상치 못한 거대한 공장이 허연 연기를 내뿜고 있다. 저런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 덕분에 불과 한나절만에 외국에 온 듯하다.


탄광촌 스케치

종착역인 철암역 도착했다.이곳은 강원도 태백시이다. V-트레인은 철암역에 정차했다가 다시 분천역으로 되돌아간다. 출발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역전 구경에 나섰다. 시간이 마치 1980년대에 멈춘 듯하다. 어릴 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읍내 같은 풍경이다.

그런데 이렇게 쇠락한 읍내 건물들을 매입하여 아예 ‘철암탄광역사촌’으로 조성해 두었다. 건물들은 철거하지도, 그렇다고 리모델링하지도 않고 낡은 그대로다. 좁고 가파른 계단도 그대로, 낡은 간판도 그대로다. 그 모습 그대로 관광자원화하는 방식이 참신하다.


걷다 보니 벽화도 있고, 시냇물 건너에는 커다란 광부 부조상도 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시 글귀가 짠하다. 아마도 그 광부는 우리 부모님 세대일 것이다.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어쩌면 자식들은 넓은 세상 어디론가 나가서 살고 있을 것이다.


광부의 출근


당신 허리 다친 거 괜찮아요?
자면서 앓는 소리 하시던데...

괜찮아! 다음 달에 아버지 생신인데

만근해야 고기라도 좀 사드리지

애들은 어디 갔어?

뒷마당에서 놀고 있어요

얘들아~ 아버지 일 나가신다

아부지 다녀오세요~


탄광역사촌 거리에는 연탄 만들기 체험하는 곳도 있다. 한 어린이가 도움을 받아가며 힘껏 연탄을 만들고 있다. 저 어린이는 알까? 그 시절에 연탄이 서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물론 연탄을 집에 가져갈 리 없겠지만, 만든 연탄이 어떻게 쓰일지도 궁금하다.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도 보인다.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옛날을 떠올리게 한다. 벽화 속 노동자 군상 그림 위로 눈발이 날린다. 시커먼 연탄 모양 조형물에도 눈이 쌓인다. 검은 벽화 위에 날리는 하얀 눈은 마치 힘들었던 한 세월을 소리 없이 보듬어 주는 듯하다. 다시 봄이 오면 검은 탄광촌에 초록이 희망을 입혀줄까.

그 시절의 인물들이 그려진 벽화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백두대간의 겨울 협곡

"출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일단 뛰자!"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영하의 한겨울 날씨지만 등에는 땀이 난다. 만약 돌아가는 열차를 놓치면 언제 다음 기차를 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숨을 헐떡거리며 서둘러 역 구내 들어오니 다양한 특산품과 음식을 팔고 있다. 급하게 수수부꾸미 한 봉지를 집어 계산한다. 강원도에 왔으니까 왠지 이걸 사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협곡열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올라타자마자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천천히 출발한다. 올 때와는 다른 방향에 앉았다. 바깥을 구경하는 사이 차가운 바람에 몸이 꽁꽁 얼었다. 식은 손끝을 녹이려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낸다. 라즈베리 티백을 뜯는다. 달콤하고 상큼한 티 한 잔이 따뜻하게 마음까지 녹여준다.


다시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내려가는 길, 승객들은 설렘 대신 이제 만족스러운 여유가 느껴진다. 웃음과 미소가 열차 안에 가득하다. 앞자리 꼬마의 재롱도, 젊은 남녀 커플의 꽁냥꽁냥 닭살 애정도 사랑스럽다.


돌아오는 길도 하얗게 눈 내린 겨울 협곡이다. 같은 길이지만 올 적 갈 적 조금 달라 보인다. 창밖 풍경을 원 없이 감상한다. 이렇게 백두대간은 협곡 열차에게 겨울 속살을 내보인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전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웅장하게만 느껴지던 백두대간이 왠지 포근한 어머니의 품처럼 느껴진다. 문득 초록이 우거진 백두대간 협곡에 다시 오고 싶다는 소망이 솟아난다. 그때는 세 평 하늘 승부역 계곡에 발을 담그고 백두대간이 들려주는 물소리를 들으리라.

다시 분천역으로 돌아가는 협곡 열차


오늘도 글벗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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