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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산에서 발견한 '머니 코드'와 사계절의 행복

올가을 마지막 단풍놀이, 장태산자연휴양림 탐방기

by 새벽강

올해 마지막 단풍놀이

11월의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대전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장태산자연휴양림.

브런치팀으로부터 두 달 전에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배지를 받은 후, 올가을에 꼭 다녀와 글을 남기고 싶었던 곳이다. 장태산은 지난 주말까지 메타세쿼이아 단풍을 보기 위한 인파가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편도 2차선의 입구 도로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기다란 지체꼬리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오늘따라 대전으로 가는 고속도로 주변에 메타세쿼이아나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직 주황색 단풍이 남아 있는 나무도 있고, 잎이 거의 떨어진 나무도 있다. 그래도 장태산에서는 단풍 구경할 수 있기를...

어, 그런데 예상외로 많이 막힌다던 휴양림 입구 도로가 전혀 막히지 않는다. 살짝 불안한 예감이 든다. 장태산은 대전 도심에서는 떨어진 곳이니 혹시 이른 추위에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버린 건 아닐까?


휴양림에 가까워질수록 이미 잎이 다 떨어진 나무 비율이 높아졌다. 사실 이미 단풍철은 지났고, 내일이 벌써 12월이라 마음을 조금씩 비우며 찾아갔다. 지난 주중에 한차례 비바람이 지나간 탓인지 떨어진 낙엽만큼이나 관광객들도 줄어든 모양이다. 인기 있는 4, 5 주차장에도 빈자리가 많아서 쉽게 주차했다.

사진 왼쪽 아래에 4 주차장, 출렁다리 아래 5 주차장


그래도 다행이다!

5 주차장 좋은 자리에 주차하고 고개를 올려다본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예상처럼 단풍이 든 많은 잎들이 이미 떨어졌지만, 나무 윗부분에는 주황색 단풍이 아직 제법 남아 있다. 뾰족한 나무 꼭대기가 살아 있다. 마음을 비우고 온 덕분인지 오히려 감사하다.

다행히 뾰족한 나무 꼭대기에 단풍이 남아 있다


방문객들에게 인기 많은 출렁다리와 멀리 포토존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앞사람들을 따라 올라간다. 안개가 걷혔지만 휴양림은 촉촉하다. 갈색 낙엽이 쌓인 바닥이 폭신폭신하다. 무엇보다 숲 향기가 좋다.

"무슨 향기 나지?"

"아니, 난 잘 모르겠는데?"

아내는 잘 모르겠단다. 평소 비염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나인데, 이럴 때는 예민한 내 코가 고맙다. 피톤치드를 남들보다 더 깊이 체감할 수 있다.


아쉽게도 나무 바로 옆에서 걸을 수 있는 스카이워크는 폐쇄되어 있다. 계절상 미끄럽고 위험하여 운영을 중지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다. 아쉽지만, 곧바로 출렁다리로 올라간다. 텐션이 올라간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린다. 재밌게도 한국어 외에도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등 들리는 다양한 언어마다 즐거움이 묻어 있다.


스카이워크(좌), 출렁다리(우)
나와 나란히 눈높이를 맞춘 숲(출렁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

출렁다리에서 옆으로 바라본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내가 나무와 어깨를 견주며 바로 옆에 서 있는 기분이다. 서로 배려하며 사진을 남긴 후 발길을 계단으로 옮긴다. 계단을 한참 오르면 그 유명한 장태산의 대표 포토존이 나온다.


예상대로 포토존에는 인증 사진을 남기기 위해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다. 이럴 때 우리 부부의 판단은 대체로 일치한다. 빠른 포기! 우리 목적은 단풍 구경과 힐링이지 인증 사진이 아니다. 더 높은 위치의 전망대에서 줄 없이 아래 풍경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어느 단체 일행이 나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하트 포즈도 주문하고 몇 장 찍어드렸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나도 웃는 얼굴로 꾸벅 답례한다. 별거 아닌 일을 해드리고 많은 분들께 복을 한 아름 받았다.


흐뭇한 마음으로 이제 할 일은 바로 풍경 감상이다. 아까 건너온 출렁다리와 숲을 내려다본다. 흔히 장태산을 검색하면 나오는 바로 그 풍경이다. 마지막 단풍놀이를 떠나온 충분한 보상이 되는 장면이다.

메타세쿼이아 숲을 내려다보는 풍경. 이 역시 아래와 옆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또 다르다. 그리고 바위 위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솔솔하다.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는 것만 봐도 기분 좋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로 행복이 전해지고 있다.


저 '숲 속'에 누워 '행복한 산새' 될까!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와 찬바람을 맞은 아내가 기침이 난다고 한다. 내려와서 따뜻한 어묵 하나 사 먹었다. '긴급 국물 처방'을 받은 아내는 증상이 다소 나아진 모양이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좀 걸을까. 메타세쿼이아 숲 가운데 연못이 있다. 연못 위 데크를 걷는데, 물 표면에 나무가 떠 있다. 이런 장면은 놓칠 수 없지. 얼른 카메라를 꺼내 반영샷을 찍는다.


키가 큰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캠핑을 하고 짐을 싸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캠핑 데크마다 옆에 나무 썬베드가 놓여 있다. 비어 있는 나무 썬베드가 두 개 보인다. 아내와 하나씩 차지하고 나란히 눕는다. 내가 음악을 켜서 한쪽 이어폰을 건네니 아내는 자신의 귀를 가리킨다. 이미 듣고 있다는 표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의 선곡이 일치했다.


캐논 변주곡!

아내는 캐논 변주곡을 여러 악기로 돌아가면서 연주하는 유튜브 영상을, 나는 레이어드클래식의 캐논 연주 영상을 골랐다. 누워서 숲을 올려다보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캐논 연주에 맞추어 춤이라도 추듯이 나무 꼭대기는 천천히 흔들흔들 바람에 움직인다. 낙우송 이름의 유래처럼 메타세쿼이아 나뭇잎이 새 깃털처럼 빙그르르 돌면서 떨어진다. 바람이 불 때 나무는 캐논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낙엽은 장식음처럼 떨어지며 숲의 풍경을 꾸며 준다. 작은 산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숲을 노래한다.


햇살, 바람, 나무, 산새, 낙엽...

뭐 하나 부족함이 없다.

예정에 없던 삼림욕을 만끽한다.

행복이 뭐 별 건가.

이 순간이 행복인 것을.

썬베드에 누워서 올려다본 풍경
휴양림 산림욕장 썬베드(좌), 단체 사진 찍는 뒷모습이 정겹다(우)



'캐논 변주곡'과 조지 윈스턴의《디셈버(December)》

1980년대 말 우리나라에도 뉴에이지 음악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감수성이 한창 풍부한 고등학생이었다. 어느 날 포맷이 색다른 음악 방송을 텔레비전에서 봤다. 당시 세련된 이혜영 배우가 진행하던 <뮤직박스>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소개해준 노래보다 프로그램 로고 음악이 더 화제가 되었다. 듣기 편안한 피아노 연주곡이었다. 조지 윈스턴의 '땡스기빙'이라는 뉴에이지 곡이었다. 이 곡이 수록된 음반 《December》는 큰 인기를 얻었다. 나도 큰맘 먹고 시내 레코드가게에 직접 가서 정품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저작권 개념이 약하던 시절이라 도심 길거리 곳곳에 '길보드 차트'라 불리는 불법 녹음테이프가 유통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은 LP판이나 카세트테이프로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길보드에서 인기곡만 편집된 테이프를 사기도 하고,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공테이프에 녹음해서 듣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기억하실까? 카세트에서 녹음할 때 녹음 버튼과 플레이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누르던 그 시절을.


아무튼, 뉴에이지 음반인《December》는 당시 한국에서만 1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유명 팝 가수도 아닌 연주곡 앨범임에도 말이다. 용돈을 쪼개 쓰던 고등학생인 나도 샀으니 그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그 음반에는 '캐논 변주곡'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 곡 역시 널리 알려졌다. 캐논 원곡을 작곡하신 분이 요한 파헬벨이라는 것도.


'도-솔-레-라

파-도-파-솔'

캐논 도입부의 여덟 음의 계이름이다. 이 여덟 음은 곡 전체를 관통하는 코드 진행의 뼈대가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입혀지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들. 들을 때마다 감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완벽할 수 있지. 이제는 많이 들어 너무 익숙하지만 여전히 그 완벽함에 대한 놀라움은 이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NXHkXSJTIxE&list=RDNXHkXSJTIxE&start_radio=1



Life is Cool! (인생은 멋져요!)

캐논 변주곡을 누워서 듣다가 다른 곡도 찾아 듣는다. 개인적으로 악동뮤지션의 곡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오랜 날 오랜 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를 특히 좋아한다. 그런데 악뮤의 '오랜 날 오랜 밤' 도입부와 간주 부분에 캐논 코드가 들어 있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악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https://www.youtube.com/watch?v=wEQpfil0IYA&list=RDwEQpfil0IYA&start_radio=1


캐논을 샘플링한 유명한 곡으로 독일의 크로스오버 그룹 Sweetbox가 부른 'Life is Cool'이 있다. 우리나라 통신사 광고 음악으로도 사용되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노래다. 듣다 보면 경쾌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전해진다.


life is so cool (인생은 너무 멋져요.)

Oh yeah, from a different point of view (조금만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말이죠.)


Gotta remember we live what we choose (모두 기억해야 해요. 우린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It's not what you say, it's what you do (인생은 말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And the life you want is the life you have to make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삶은 당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My life is... (내 인생은 ...)

life is so cool, life is so cool (인생은 너무 멋져요, 인생은 너무 멋져요.)

https://www.youtube.com/watch?v=eOqSUto9Z1g&list=RDeOqSUto9Z1g&start_radio=1



파헬벨의 캐논 화성 진행은 음악 역사상 가장 훌륭한 코드 진행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코드는 어떤 멜로디를 올려도 잘 어울리는 보편적인 구조라서 클래식, 뉴에이지 음악 뿐만 아니라 팝이나 락 같은 대중 음악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기가 많아 심지어 '머니 코드'라고 불릴 정도다.

캐논의 화성 진행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주된 이유는 안정적인 순환구조에 있다고 한다. 8마디 코드가 곡 전체에서 반복된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패턴의 반복은 듣는 이에게 심리적인 안정감과 친숙함을 준다.


장태산휴양림 썬베드에 누워서 캐논 변주곡을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캐논의 코드 진행과 사계절의 운행이 놀랍도록 닮았다는 것을. 사계절 또한 안정적인 순환 구조이지 않은가!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계절의 변화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계절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안정감을 가지게 된다.


숲 속에 누워 음악의 편안함과 고마움을,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는다.

올해 마지막 단풍놀이로 찾은 장태산에서 감사함과 행복함을 느낀다.

바로 앞에 다가온 겨울도 이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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