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팔공산 서쪽 자락 이야기
고갯길은 산과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고개도 많다. 산과 고개는 이 고을과 저 고을을 나누었고 옛사람들이 힘들게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노래 속 꼬부랑 할머니도 힘들게 넘어가고,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갔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고개를 넘지 않아도 터널로 쉽게 산을 지날 수 있는 시대다. 오히려 예전 고갯길은 걷기 길이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주말인데, 우리 드라이브 다녀올까?"
유난히 피곤했던 한 주를 보낸 뒤 ‘한국의 아름다운 길’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대구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팔공산 한티재다. 한티재는 동서로 높고 길게 뻗은 팔공산 줄기를 넘어가는 대표적인 고갯길로, 크다는 의미의 ‘한’과 고개라는 의미의 ‘티’와 ‘재’가 합쳐져 ‘아주 큰 고갯길’이라는 뜻이다.
더운 날씨로 유명한 대구라지만 팔공산의 한여름 기온은 도심과는 사뭇 다르다. 몇 년 전에 ‘팔공산터널’이 생기면서 호젓한 한티재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주말 한나절을 팔공산에서 보내기 위해 아내와 길을 나선다.
팔공산 서쪽 자락은 동명저수지와 송림사에서 시작된다. 차량으로 접근하기 좋은 송림사는 잠시 쉬어가기 편하다. 절집 툇마루에 앉아 '탑멍'하기도 좋다. 잔디 깔린 절 마당에 균형미가 뛰어난 5층 전탑이 아름다운 풍경의 중심을 잡아 준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어 임진왜란과 몽골 침입으로 소실과 중창을 반복했으나 아직도 의연히 서 있다. 그 모습에 소원을 빌며 탑돌이 하는 사람들도 특히 많다. 2층 탑신에서는 신라시대에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초록색 유리잔과 유리병(사리장엄구)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은 적도 있다.
송림사를 지나 팔공산 아름다운 길 초입에는 가산산성이 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대표적인 산성으로 내성, 중성, 외성을 모두 갖춘 흔치 않은 3중성이다. 아직도 성곽과 성문이 잘 남아있다. 대구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정상의 널찍한 가산바위까지 트래킹해도 좋고, ‘영남제일관문’ 현판을 달고 있는 진남문 앞 잔디밭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어도 좋다. 그래도 오늘의 목적지는 한밤마을이니 갈 길을 재촉해 본다.
가산산성 입구 삼거리부터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 시작된다. 구불구불 올라가며 점점 건물들이 자취를 감추고 숲 터널이 이어진다. 창문을 활짝 내리고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창 밖으로 팔을 뻗어 바람을 느낀다. 나무 사이 여러 줄기로 갈라져 내려오는 햇살도 반갑다.
이제 곧 팔공산 서쪽 고갯마루인 한티재이다. 해발 1192m인 팔공산을 넘어가는 고개다 보니 한티재 높이도 700m를 훌쩍 넘긴다. 한티재 정상에는 넓은 주차장을 가진 휴게소가 있다. 오늘따라 주차된 차가 제법 많다. 다양한 간식거리를 파는 휴게소에도 들른다. 갈 때마다 매번 놀라지만 여기 휴게소의 물은 유난히 시원하다. 이 시원한 물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걸까?
서울 사람들에게 북한산이 그런 것처럼 대구 사람들에게 팔공산은 바로 곁에서 쉼과 여유를 준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자연 속에서 재충전할 수 있다. 봄에 대구 도심 벚꽃이 다 진 후 여기서 늦은 벚꽃을 즐길 수 있다. 여름 '대프리카' 더위를 벗어날 수 있는 시원한 곳도 바로 여기다. 팔공산 너른 자락 계곡 근처에 자리 하나만 펴면 된다. 가을에는 단풍 구경과 등산을 위해 올라온다. 한티재에서 출발하면 힘들이지 않고 능선에서 바로 팔공산 등산을 즐길 수 있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대구의 겨울에 유독 팔공산에만 눈이 내리는 날이 종종 있다. 팔공산 머리가 하얗게 된 주말에는 어린 자녀를 둔 집에서 눈구경을 하러 올라온다.
휴게소를 지나면 팔공산 북쪽은 군위군이다. 한티재 너머 내리막길도 아름답다. 멀리 팔공산 정상과 군위군의 전경이 펼쳐진다. 내리막길 가장자리에는 주정차할 공간도 충분해서 이곳에서 망중한을 즐겨도 된다. 여기를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과 두껍게 쌓인 낙엽을 밟고 놀았던 가을 어느 날이 떠오르곤 한다.
구불구불한 '아름다운 길' 구간을 다 내려가면 군위 석굴암 입구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제2석굴암'이라고 했는데, 경주 석굴암보다 조성 연대가 더 이전이라 요즘에는 '군위삼존석굴'이라 불린다. 다리를 건너 계곡 너머에 절집이 있고, 절집 옆 바위 절벽 중간에 석굴이 있다. 온화한 표정의 신라 불상이 모셔져 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는 마음은 저렇게 큰 바위도 뚫을 수 있나 보다. 그 아래에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한참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석굴암에서 계속 내려오면 오늘의 목적지인 한밤마을이 나온다. 한밤마을의 한자 지명은 대율리(大栗理)이다. 글자 그대로 '큰 밤'이 열리는 동네이다. 한밤마을은 아름다운 풍경과 장소를 품고 있는 전통마을인데, 돌담이 특히 유명하다. 제주도 현무암 돌담도 멋있고, 높은 산 선상지에 굴러 내려온 돌로 만든 한밤마을 돌담도 정감 있고 아름답다. 나지막한 돌담길을 따라 골목골목을 걸으면 마치 오래전 시간 속으로 여행 온 것 같다.
걷다 보면 마을 한가운데에 '대율리 대청'이 있다. 대청은 말 그대로 대청마루 같은 누각이다. 옆에는 마을에서 가장 큰 고택인 상매댁이 있고, 맞은편 근처에는 한옥 카페도 있다. 카페는 주말에만 운영하는데 커피 맛이 매우 뛰어나다. 쌀쌀한 계절에는 한옥의 뜨끈뜨끈한 방에서 엉덩이를 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 자리를 펼치고 쉬어갈 대율리 송림이 있다. 대율리 북쪽 입구에는 큰 솟대가 있고 그 주변에 잘 생긴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솔숲은 꽤나 넓어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한쪽에는 캠핑장도 있고, 최근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파크골프장도 만들어졌다.
솔숲 한 귀퉁이 조용한 곳에 캠핑 의자 두 개를 펼친다. 그리고 각자 가져간 책을 꺼내 읽는다. 새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책을 보다가 숲멍에 빠지기도 한다. 살포시 잠이 들 때도 있다. 이렇게 한적한 쉼의 시간을 휴대폰 사진으로 남겨두었다가 바쁜 일상 중에 가끔 열어보면 기분 전환이 된다.
"이제 그만 갈까?"
짧은 해가 고개를 넘어간다. 한나절을 솔숲 그늘에서 놀멍 쉬멍하고 나니 마음이 다시 말랑말랑하게 유연해진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는 터널로 간다. 쭉 뻗은 길만큼이나 한밤마을은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곧게 펴 주었다. 다음 한 주를 잘 살아갈 에너지를 가득 충전하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