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꽃멍 숲멍(여름) | 배롱나무꽃 | 안동 병산서원
어떤 꽃은 단순히 예쁜 것을 넘어, 시간의 무게와 역사의 이야기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목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꽃, 그리고 그 꽃이 가장 고고하게 피어나는 병산서원이 그러하다.
어느 여름 방학, 사전답사를 위해 모임 임원들과 안동 하회마을로 향하던 길이었다.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병산서원'이라는 이정표를 마주 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병산서원에도 가보자는 의견에 일행이 모두 흔쾌히 찬성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팔트 포장길이 끊기고 울퉁불퉁한 흙길이 나왔다. 유명한 유적지임에도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 점에 놀랐다. 자동차는 움푹 파인 길을 덜컹거리며 흙먼지를 날렸다. 불편함 속에서도 마치 옛 시골 완행버스를 탄 듯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왜 도로포장을 하지 않았을까요?"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다른 누군가 이내 대답했다.
"뜨내기 관광객이 몰려와 서원을 소란하게 만드는 걸 막으려는 안동 유림들의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갯길을 돌았다.
길이 조금씩 높아질수록 낙동강과 풍산 들판이 잘 내려다보였다. 초여름이 세상을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들판 사이를 둥글게 휘감으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참 의연하다. 길은 어느새 얕은 내리막으로 바뀌고, 오래된 민박집과 낡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병산서원에 다 온 모양이다.
서원 길 건너에 작은 간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병산서원으로 올라갔다. 외삼문인 복례문(復禮門)을 지나자 누각인 만대루(晩對樓)가 나타났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서원 마당으로 올라서니 입교당과 동재, 서재가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당에서 만대루로 올라갈 수 있도록 통나무로 만든 계단이 두 군데 있다. 통나무의 한쪽 면을 파낸 것이 인상적인 계단을 밟고 만대루에 올랐다.
정면 일곱 칸, 특면 두 칸으로 길게 뻗은 만대루는 오래된 서원 누각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래된 나무임에도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고 깨끗이 관리하여 자연스러운 윤기가 흐르는 바닥에 앉았다. 앉고 보니 서원 앞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왜 서원의 이름이 병산서원(屛山書院)인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남쪽으로는 푸르른 신록의 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아래를 낙동강이 흐른다. 백사장의 고운 모래도 일품이다.
병풍보다 더 병풍 같은 풍경에 매료되어 기둥에 기대어 앉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멀리 바라보던 시선이 누각 가까운 곳으로 내려간다. 만대루 옆 아래쪽에는 연못 광영지(光影池)가 있다. 아마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자연관이 형상화된 것이리라. 그런데 그 풍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붉은 배롱나무꽃이었다. 서원의 고풍스러운 흙 담장 앞 연못가에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하늘로 피워 올리고 있다. 연못 물 위에도 붉은 잎들이 떠있다. 온통 초록빛 세상 속에서 도드라지는 붉은빛이 참 곱디곱다. 분홍빛이라고 하기엔 더 진하고, 마냥 붉다고만 하기엔 빛이 선연하고 고귀하다.
그러고 나서 돌아보니 서원에는 곳곳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많다. 특히 서원의 강학 공간인 입교당 마루에 올라 뒷문으로 내다보니 사당인 존덕사 담장 주위로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령이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배롱나무 여러 그루에 붉은 꽃들이 가득하다.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매끈한 나뭇가지와 줄기도 그 모습이 매우 단정하면서도 휘어진 모습이 예술적이다.
그날 나는 주변 자연 풍광과 어울리는 병산서원의 배치와 만대루에 감탄하고,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만 흠뻑 취했다. 그 이전에도 동네 거리에서 어린 배롱나무꽃을 종종 본 적이 있다. 그때에도 꽃의 붉은빛이 곱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마음을 뺏기지는 않았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많이 심어졌다고 한다. 양귀비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현종이 배롱나무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하니, 현종의 마음도 이러하였을까.
함께 방문한 일행들 역시 이곳이 좋다며, 그해 모임 숙박은 원래 계획했던 하회마을 안이 아니라 병산서원 입구 민박집으로 정해졌다. 덕분에 만대루와 배롱나무꽃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달밤에 병산 아래 낙동강 백사장에 나와서 즐거운 모임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대상과 조우하는 것을 즐긴다. 이왕이면 가본 적 없는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곤 한다. 그렇지만 정말 좋은 곳은 두고두고 그리워하다가 결국 다시 찾아가게 된다. 병산서원의 배롱나무꽃과 만대루가 나에게 그러한 곳이다.
목백일홍 /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 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도종환, 『담쟁이』(시인생각, 2012)
◉ 배롱나무 꽃말: 부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
◈ 전국 배롱나무 명소
- 안동: 병산서원, 채화정
- 담양: 명옥헌
- 경주: 서출지, 종오정
- 강진: 백련사
- 청도: 연지
- 논산: 종학당, 명재고택
- 칠곡: 가실성당
- 화순: 만연사
- 대구: 하목정, 육신사
- 서울: 덕수궁
*병산서원은 세계문화유산 - 한국의 서원 9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