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
하루끼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친구의 연락처를 들고 무작정 비행기에 오른 적이 있다. 무얼 보아야 할 것도 무얼 해내야 할 것도 없이 친구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여행길에 올랐다. 마음 한 켠을 비워 놓으리라는 생각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가는 동안 무심히 바라본 하늘, 황혼 녘의 하늘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쉬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난 비로소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보던 풍경과 사뭇 다른 풍경들, 나무, 바람, 공기..그리고 낯선 사람들 틈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지만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설레임을 선사했다. 모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새로운 풍경들을 만나고, 오래된 기억 위에 오버랩 되어 기이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기억이 중첩되는 어느 시점에 이르면 셔터는 눌러졌고 그렇게 찍힌 이미지의 파편들은 시간의 벽을 넘어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어떤 여행도 후회는 없다. 자극을 위한 여행이든,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한 여행이든, 휴식을 위한 여행이든 여행은 그것으로 소중하다.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고, 그 속에서 내가 자란다. 나라는 나무에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나의 그림도 하나 둘씩 나이를 먹는다.
나는 풍경을 그린다. 기억속의 아득한 풍경..그러나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내가 서있던 공간에서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 풍경들, 이야기들..그들은 조용히 속삭인다. 그 속삭임은 너무나 고요해서 잘 들리지 않지만 마음의 빗장을 조금 느슨히 하면 그들의 속삭임을 느낄 수 있다. 사소한 것들에게서 위안을 얻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어쩌면 내가 길을 떠나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표현되지 못하는 가슴속의 열망은 카메라라는 연필로 스케치북에 속사화를 그려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긴 시간을 지나 다시 나를 시간여행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그것들은 캔버스 위로 옮겨진다. 옮겨지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지운다. 그리는 것보다 어려운 게 지우는 일이라는 걸 새삼 배운다.
*이 글은 2009년 개인전 Trvel Note (닥터박 갤러리)를 위해 쓰여진 글로 공식적인 나의 첫 작업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