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
그림이 완성을 향하고 있다. 다른 많은 것들처럼 그림 속에도 속도의 차이가 있다. 느리게 소요하게 되는 시간, 전력질주하게 되는 시간 그 사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 등이 그렇다. 완성은 그 서로 다른 시간들이 함께 힘을 모으는 구간이 아닐까 한다. 레이어는 시간의 다른 이름 같다고 느끼며 작업을 하는데, 어떤 부분은 이틀쯤 후에 다시 손을 봐야 하고 어떤 부분은 지금 당장 휘몰아쳐야 하기도 하다. 작품 촬영날을 정해두고 달리다 보면 일주일 전에는 그림이 끝나야 건조, 포장, 운송이 가능해진다. 결국 나의 골인지점은 못박아 놓은 날보다 일주일전이 되어야 맞다.
서로 다른 시간의 농도로 채워진 레이어 여러 장을 들고 자기에게 꼭 맞는 자리에 레이어를 올리고 싶다. 그림을 보다 보면 아무것도 모르겠다가도 어느 순간 그림 안에 들어와 있기도 하다. 그림 안에서 노니는 것은 어쩌면 그림 안의 풍경에 차이를 내어주고 차이의 거리들을 가늠하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광속 같이 농축된 속도와 흩날리는 눈송이의 속도처럼 투명한 속도가 혼재한다. 바둑을 둘 때 두어야 할 수의 몇 걸음을 미리 가늠해 본다고 하더라.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내가 두어야 할 수를 미리 짐작해 보고 물질로 존재하지 않는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이다.
나의 상상이 타인의 상상에 가 닿기를 바라며 속도와 밀도와 그 서로 다름을 어쩌면 그리는 방법과 함께 그려진 그림이 표상하는 작은 존재들에 덧입혀 지는 것 같다. 그래서 고맙다.
전시가 다시 다가오고 이제는 더 이상 숨이 차지 않다. 처음 달리기를 할 때 100m 200m를 달리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매일 달리게 되면 달리는 속도에 심폐기능이 적응되어 숨이 고르게 차다. 하나의 전시, 그 다음 전시는 기쁜 일상이다. 그렇다고 달리기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달리지만 죽을 것 같이 숨이 차오르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힘이 들지만 고르게 힘을 분배하다 보면 속도의 기술이란 것이 등장한다. 잘 만들어진 갓구운 요리를 먹을 때 각각의 재료내음과 불내음이 함께 난다. 그림도 속도를 가지고 몰아 부칠 때 속도만의 결이란 것이 생긴다. 속도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물감층들이 엉키고 부비는 시간을 짧게 한다. 여기서는 레이어링이 아니고 블렌딩이 된다. 그 짧은 속도는 많은 것을 서로간 허용하여 완성에 다다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나와 다름이 서로 간에 자신을 양보하여 다름이 들어올 자리를 내어 주는 것과 같다. 열 번 보고 한번 그린다는 말이 있다. 완성은 그리 해야 맞다. 또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림이 저만치 달려가 있을 때가 있다. 그림은 생명이고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나의 의도와 나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그림이 스스로에게 필요한 레이어를 덧대어 완성의 옷을 입는다.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시를 가까이 앞둔 많은 날들이 나에게 속도의 기술로 그림을 완성하게 하였다. 속도의 냄새가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리고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