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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리스트

by 에티텔
이효연, Bookbook, 캔버스에 과슈, 53x45.5cm, 2023

나는 책을 완독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마음에 드는 제목의 페이지를 펼쳐 읽고 상념에 젖는다. 한 챕터를 읽고 쉬는 일도 거의 없고 몇 페이지, 몇 문장을 읽고 그럴 때가 더 많다. 언젠가 세 명의 시인이 함께 진행하는 시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인 분들이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읽을 수 없는 경우와 책을 무한히 읽을 수 있지만 쓸 수는 없는 경우를 두고 하나를 고르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시인들 모두 쓰기만 하는 것을 골랐다.

남의 창작물을 보는 것도 좋지만 내 것을 만드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일 게다. 게다가 나처럼 남의 글을 온전히 하나로 감상하고 그 기분에 젖는 일이 드문 분절독서가는 언제나 사냥꾼처럼 작업의 모티브를 기다리는 사람이지 말이다.

그럼에도 시집을 읽을 때 한 시인의 모든 책을 알고 가려하곤 하는데, 고선경 시인을 읽다가 소스리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시집 혹은 소설집의 자양분이 된 영감의 원천 열두 가지가 담긴 소스를 소개하는 오프라인 행사의 제목이며 동시에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효연, 창가,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60.6x90.9cm, 2023

그림을 그리다 보면 꼭 그려보고 싶은 것이 있어 그걸 그릴 수 있게 스토리를 만들고 공간을 할애하고 그림에게 명분의 옷을 입히기도 한다. 물론 내 경우다. 그럴 만큼 그리고 싶은 한 장면 같은 것은 뇌리에 비수처럼 새겨져 그리고 싶은 욕구를 해결하기 전까진 내내 그 장면만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아주 운이 좋은 경우이고 대부분은 없는 영감을 부여잡으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이미지 사냥을 하거나 직접 사진을 찍으러 출사를 나가거나 한다.

폴더를 연도별로 정리한 지 20년이 넘고 있다. 거의 작업을 시작한 이레로 쭈욱 그렇게 연도별로 이미지들을 관리하고 있다. 그중 빠지지 않는 폴더명이 두 개인데 하나는 artworks 나머지는 source다. 달리 말하면 artworks는 output이고 source는 input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있어야 꺼낼 것도 생기는 이치다. 그러나 나의 작업량은 나의 감상량을 넘지 못한다. 하루 종일 모티브를 찾아 검색창 앞에서 보내는 날도 부지기수다.


이효연, 정물,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72.7x90.9cm, 2023

새로 주문한 소스리스트라는 책으로 돌아와 보자. 사실 기대보다 소박한 책이다. 그건 원석이란 보는 이의 눈에 그렇게 보여야 원석이 되기 때문인 듯하다. 저자들은 자신의 어떤 경험이 시와 소설의 모티브로 작용했는지 적어 놓았지만 아름다운 시집에 비해 원석은 너무나 거칠었다. 흙이 잔뜩 묻은 원석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원석을 빛나게 만든 것이 그들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림도 다르지 않다. 구도를 위해, 색감을 위해 모티브들을 작업에 데려 온다. 다른 이는 그런 나의 마음을 읽기 어려울 것이다. 요리를 먹을 줄만 알았지 원재료를 손질해 본 적 없다면 식재료의 식감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남의 얘기로 들릴 것이다.

처음 책을 읽는 이유는 밑줄을 긋고 싶어서였다. 밑줄은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어에 긋곤 했는데 그렇게 채집된 단어를 서로 다른 맥락에 끼워 넣으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러므로 독서는 나에게 소스검색시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난 두어 문장에서 멈춰 선 채 먼 상상을 하며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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