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독자
이효연, 작업실 책상 위,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53x45.5cm, 2023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원고를 읽고서 버려질 뻔한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하게 하여 지금의 스티븐 킹이 있게 한 사람,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 유명한 일화는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온다. 위대한 작가 뒤에 숨은 또 한 사람의 작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첫 번째 관객이며 첫 번째 독자이다. 고흐 뒤에 그의 동생 테오가 있었고, 버지니아 울프 뒤에는 그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있었다.
작가에게 있어 첫 번째 독자는 단순히 글을 먼저 읽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문장이 아직 불완전하고, 줄거리가 흐릿하며, 인물들이 온전히 살아 숨 쉬기 전부터, 혹은 무얼 그렸는지 알아보기 어려운 초벌의 단계부터 그 글 또는 그림을 마주하고 읽는다. 작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문장을 내보일 때, 그 옆에서 조심스레, 그러나 정직하게 반응을 건네는 사람. 바로 그들이 첫 번째 독자다.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어둠 속을 더듬으며 써 내려가는 동안, 조용히 촛불을 들고 기다려주는 이. 그 존재 없이는 많은 작가가 끝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효연, 새벽달, 아사에 유채, 53x45.5cm, 2023첫 번째 독자는 종종 작가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배우자, 연인, 친구, 혹은 오랜 동료. 그들은 작가의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고뇌, 불안, 희열까지도 함께 읽는다. 글을 비평하는 눈과 동시에, 작가를 지지하는 마음을 갖춘 이들이다. 그래서 첫 번째 독자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이자 조용한 동반자이다. 작가는 홀로 쓰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나에게도 첫 번째 독자가 있다. 언제나처럼 내 그림과 글을 한 사람에게 꾸준히 물어보곤 한다. 즉각적인 반응에서부터 섬세한 교정까지 그의 활약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눈이라는 냉정함을 원하고 또 동시에 열렬한 지지를 바란다. 못된 이기주의 맞다. 내가 심술 맞을수록 독자의 역할은 어려워지는데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꾸준히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외에도 무심결에 내뱉어진 타인들의 반응도 나에겐 자양분이 되곤 한다. 학교에서 판화를 배운 적이 있는데 개방된 실기실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림이 노출되어 있었다. 어느 프린터 선생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전의 것이 더 좋았다고 무심코 얘기하셨다. 그 얘기 덕분에 나는 산으로 가던 배를 끌어내린 적이 있다. 그뿐 아니라 타인들의 무심코 던진 반응은 지나치게 안으로 들어가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진 작가를 구원해 주는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럼에도 제삼자의 눈이라는 것이 갖는 객관성을 나는 믿는 편이다.
그림이 길을 잃었을 때 난 자주 산책을 하거나 환기를 한다.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캔버스의 위아래를 뒤집어 놓고 새로운 시선을 찾아내는 시도를 한다. 아래 위로도 모르겠으면 포토샵의 도움을 받아 좌우를 돌려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만큼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여정은 길고도 험하다. 외롭고 무섭고 걱정되지만 그럴 때 곁에서 무한한 지지를 받으면서 작품은 완성된다. 요즘은 공동작업이 보편화되어가는 세상이다. 리한나의 곡 하나에 수십 수백 명의 작곡가와 연주자가 협업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만큼 타인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하는 우리 모두는 어디서고 첫 번째 독자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작가의 노고를 지지한다
이효연, 달그림자, 패널에 유채, 53x33.4cm, 2023첫 번째 독자에게 전하는 고마움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의 반응 하나, 고개 끄덕임 하나에 힘을 얻는다. 첫 번째 독자의 신뢰는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연료이자 등불이다. 그 고마움은 책의 첫 장에, 혹은 헌사의 문장으로 남는다. "이 책은 당신이 없었다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