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르와 아스마르』
『아주르와 아스마르』원작 미셸 오슬로, 김주열 옮김, 웅진주니어, 2007
『Azur & Asmar』(2006)
삼 년 전 인도네시아행이 결정되고 난 후 제일 먼저 이슬람 문화를 아이들의 수준에서 설명한 책을 구매했다. 기후의 변화는 몸이 적응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종교와 문화의 변화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우려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알 수 있는 이슬람 문화는 참으로 단편적이어서 두려움이 앞섰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말조심, 행동조심을 무척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함을 알게 되었지만, 매일 새벽부터 울리는 아잔 소리 같이 아직 여러 부분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이질감을 쉽게 떨쳐낼 수 없다. 특히 요즘 같은 라마단 기간에는 더욱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주르와 아스마르』
는 이와 같은 고민과 해결의 실마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표지에서 볼 수 있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림이 자연스레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프랑스어로 파란색을 뜻하는 아주르와 아랍어로 갈색을 뜻하는 아스마르. 두 인물의 옷차림과 피부색, 타고 있는 말의 색깔까지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림에서 독자들은 얼핏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소년 아주르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아랍 출신 소년 아스마르와 함께 그의 엄마인 유모 제난에게서 형제처럼 자라난다. 유모의 고향에서 내려오는 전설인 요정 진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서로 자신이 먼저 요정 진을 구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엄격한 귀족이었던 아주르의 아버지는 유모의 자식과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후 아주르를 도시로 유학 보내고 아스마르 모자는 내쫓아 버린다. 청년으로 성장한 아주르는 꿈에 그리던 요정 진을 찾아 나서고 아스마르와 재회한다. 그 과정에서 그려지는 찬란한 이슬람 문화의 산물들이 압권이다.
이 작품은 영화 원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으로 원작자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셸 오슬로 감독이다. 줄거리만으로는 그동안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공주나 요정을 구하러 모험을 떠나는 동화나 민담이야기와 비슷해 보인다. 아랍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천일야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의 전작 <키리쿠와 마녀>, <프린스 앤 프린세스> 등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그림체와 화려하고 선명한 색감, 유머러스한 이야기, 독특한 캐릭터 같은 감독 특유의 감각이 영화에도 그림책에도 그대로 살아있다. 특히 감독 본인이 어릴 적 프랑스령 기니에서 살다가 프랑스 본토로 돌아와 겪은 개인적인 혼란과 갈등을 작품에서 잘 풀어내어 매우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비현실적인 메르헨(민담, 신화전설 등)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속에 지극히 현실적인 “서로 다른 문화 간 상호이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 뻔하지 않은 깊은 울림을 준다.
화려한 궁전과 아라베스크 문양 등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과 터키 이스탄불을 직접 방문하고 고증을 거쳐 제작되었다. 요정 진이 있는 아름다운 성은 성 소피아 대성당과 블루 모스크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9세기에서 16세기까지 가장 개방적이면서도 눈부신 전성기를 누렸던 이슬람 문명을 보여주고자 했던 원작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유럽에서 아스마르와 유모가 겪었던 수모를 바다 건너온 아주르 역시 낯선 땅에서 겪는다. 이에 아주르는 눈을 감고 장님처럼 행동한다. 눈을 감으면서 차별을 부르는 여러 모습들은 못 보게 되었지만, 대신 더 중요한 것을 보는 마음의 눈을 떴다. 그리하여 요정 진을 찾는 데 필요한 열쇠를 발견했고, 그리운 유모도 다시 만났다. 얼핏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 혹은 유럽 백인들과 이슬람인들의 갈등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리의 부랑자 크라푸, 어리지만 똑똑하고 당찬 샴수 사바 공주, 늙은 이방인 현인 야도아 등을 통해 전 세계 언제 어디에나 있는 종교/성/세대/계급/빈부 등 다양한 분열과 화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유모 제난이 말했듯 무지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고정된 이미지를 보는 눈은 감고, 오감을 열어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백인의 입장에서만 본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내가 누구든, 상대가 누구든 결국 선의를 가지고 타자를 인정하고 환대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 우리는 상대가 누구든 공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마을 안에 모스크(이슬람), 교회(기독교) 그리고 시나고그(유대교)가 같이 있는 그림책 속 장면은 그런 메시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결국 다름이, 다양함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 내니까 말이다.
(『아주르와 아스마르의 이슬람 박물관』 도 함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