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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Oct 26. 2024

봄을 기다리며

『숲으로 보낸 편지』

『숲으로 보낸 편지』가타야마 레이코 글, 가타야마 켄 그림, 김누리 옮김, 상추쌈, 2022

もりのてがみ(1990)

 





편지를 주고받은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보면 너무도 아득하다. 감수성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같이 책도 공유하고 일기도 공유했던 단짝이 남미로 이민을 떠났다.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꼭 편지하자고 주고받은 낯선 타국의 주소. 국제 우편으로 보냈던 그 편지들이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편지는 상대를 항한 마음을 전하는 도구였고, 또 내가 전한 마음에 대한 답을 바라는 간절한 기다림이기도 했다. 같은 마음으로 숲 속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낸 아이가 있다. 아이의 편지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숲으로 보낸 편지』 속 히로코의 이야기다.


숲 근처에 사는 히로코는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어 밖에 나가 놀 수가 없다.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추운 겨울이 오기 전 같이 놀던 숲 속 친구들에게 제비꽃 피는 봄이 오면 꼭 다시 만나자는 편지를 쓴다. 기나긴 겨울 내내 초록 눈을 한 다람쥐, 꼬리가 잘린 도마뱀, 노래를 가르쳐 준 새들, 귀가 까만 산토끼에게 차례로 편지를 쓴 후 모두가 모여 놀던 전나무 밑에 하나씩 매달아 둔다. 기다리던 봄이 오는 신호와 함께 받은 친구들의 답장. 모두와 함께 설레는 봄을 맞이한다. 춥고 황량한 계절을 따뜻하게 만들며 봄을 기다리는 히로코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이 작품은 시인 가타야마 레이코와 화가 가타야마 켄 부부가 같이 만든 그림책이다. 일본에서는 30여 년 전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을 받아온 그림책의 고전이라 말할 수 있다. 가로로 긴 판형의 표지를 가득 채운 커다란 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밑에 빨간 코트를 입은 아이와 성탄 트리 장식 같이 조롱조롱 매달린 작은 편지들이 있다. 표지 그림으로 제목의 의미를 유추하며 넘기면 나오는 연한 연둣빛 속지. 겨울을 버텨낸 메마른 가지들이 새싹을 틔울 때, 그 찰나에만 볼 수 있는 빛깔이다. 봄을 그리며 기다리는 편지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며 한 장씩 책장을 넘겨간다. 작가들은 직접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편지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가 직접 쓰고 그린 듯 삐뚤빼뚤한 글과 그림은 서툴지만 진심이 담겨있어 감동적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석유곤로 옆에서 발이 닿지 않는 큰 의자에 앉아 열심히 집중하여 편지를 쓰는 히로코. 가을에 같이 주운 듯한 도토리와 호두가 책상에 있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편지에 담아낸다. 꼬리가 떨어졌던 도마뱀에게는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반창고를 동봉하고, 민들레 들판에 새집을 짓던 토끼들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히로코와 숲을 연결해 주는 메신저는 표지에서 보았던 거대한 전나무다. 모두가 같이 모여 놀 때도, 겨울이 되어 다들 만날 수 없을 때도 변함없이 늘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푸른 전나무. 히로코는 전나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편지로 보낸다. 




밖은 매서운 겨울이지만 아이의 마음만은 집안의 훈훈한 온기만큼 따사롭다. 분명 그림의 힘이다. 정말 독자의 옆에 따뜻한 곤로가 켜져 있고, 눈앞에는 색연필로 알록달록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있는 듯하다. 동그랗게 등을 구부린 채 작은 손으로 히로코가 직접 그리고 오린 우표, 그 위에 지우개 도장으로 찍은 소인, 편지 속 제비꽃 한송이, 도토리 한 알. 이 모두는 겨울을 인내하며 그 뒤에 올, 그러나 언제 올지 모르는 따스한 봄을 기다리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다. 



히로코가 쓴 편지들을 전나무에 달아 두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답고 또 압도되는 무언가가 있어 한참 바라보게 된다. 가로로 긴 판형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겨울에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양면 가득 펼쳐진 전나무. 강인하고 경이로운 생명력을 지닌 자연을 나타내는 나무가 히로코를 향해 두 팔 벌려 포근하게 안아주는 이미지를 연출한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겨우 내 히로코의 편지가 바람에 날아가거나 눈에 젖어 찢어지지 않게 지켜준다.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현관에 놓인 열매와 꽃들을 보고 히로코는 친구들이 보내온 답장임을 알아차린다. 제비꽃이 한가득 피어난 숲에서 친구들이 히로코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편지 고마워요. 봄이 왔네요!”

 


지난한 기다림을 묵묵히 아주 사랑스러운 방법으로 끝까지 견뎌낸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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