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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Nov 02. 2020

가을 한 적한 곳에 낚시하는 어부, 부러워 죽겠네

강세황_임거추경도

강세황_임거추경도_지본담채_중앙박물관(출처)



  나뭇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찬 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기도 하고, 가끔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한다. 어느덧 가을이다. 가을이 주는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동해를 보러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훌쩍 떠나기도 했었는데, 이번 가을은 가족들 일정이 모두 맞지 않아 단풍 구경하러 갈 수 없었다. 혼자라도 가면 좋겠지만 지난 여름 ‘백만 광년의 외로움’에 빠졌던 터라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세황 초사(출처:국립중앙박물관)

  그래도 다행인 건 얼마 전 ‘우리옛그림연구소’ 동료들과 진도의 ‘운림산방’을 답사했었다는 것. 소치 허련이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마련한 작업실로, 옆으로는 쌍계사가 있고 뒤로는 점찰산 그리고 앞으로는 아늑한 공간의 운치를 더하는 연못이 있다. 운림산방은 절정이 다다르지 않은 가을이었음에도, 그 빼어남을 다 뽐내지 못했음에도 보고 있노라면 ‘아름답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비록 이번 답사에서 우리나라 남쪽 끝까지 단풍이 다다르지 않아 알록달록 물결은 볼 수 없었지만 남해도 보고 옛사람의 운치를 잠시 맛볼 수 있었다. 

  가을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은 강세황의 ‘임거추경도’를 볼 참이다. 이 그림은 강세황이 1784년 지산(오늘날의 용산)에서 부채 16자루를 우연히 얻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고 하는데 그중 한 점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려고 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오른편 시다.      


    樹屋依山僻(수옥의산벽) : 나무 속 오두막은 산에 붙어 외진데

    千林照水殷(천림조수은) : 울창한 수풀은 물에 비치니 은은하여라.

    羨殺漁舟子(선살어주자) : 고기 잡는 어부가 부러워 죽겠는데

    攬盡好溪山(남진호계산) : 좋은 계곡과 산에 닻줄 다 풀어놓았구나.   

  

  강세황의 ‘고기 잡는 어부가 부러워 죽겠는데’라는 대목에 공감 백만 개는 눌러주고 싶다. 멋진 산과 강 그리고 단풍이 있는 그런 곳에 살수만 있다면 무엇을 한들 행복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서인지 삶 가운데 조금씩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아주 가끔 행복을 느끼곤 한다. 아직 내공이 부족한 탓에 조금밖에 느끼지 못하지만, 나이가 60대가 되면 매일매일의 소소한 일상이 행복해지겠지. 

  강세황은 나이 61세(1773년 )에 음서로 하급관리가 되어 66세에 장원급제를 하고 예조판서까지 오른 인물이다. 특히 72세 때인 1784년은 그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던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대쪽 같으면서도 절제할 줄 아는 그의 성품이 고스란히 담긴 이 그림에는 70대의 완숙한 솜씨가 모두 들어가 매우 빼어나게 아름다운 가을날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우선‘임거추경도’는 청초에 발행되어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하던 ‘개자원화전’이란 화보에 실린 구성을 따르고 있다. 근경엔 작은 언덕과 나무, 중경엔 나무숲과 강 그리고 부러움의 대상인 어부가 타고 있는 고깃배, 원경엔 산과 수풀 그리고 가옥을 배치했다. 그림 전체적으로 선묘가 많은데 강세황의 능숙 능란함이 보인다. 멀리 있는 산의 모습은 대체로 엷은 먹의 붓놀림을 하였는데, 마(馬)올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피마준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명암과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산속 나무들의 무성함은 진한 미점(작은 동그란 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근경의 다섯 그루 나뭇잎은 여러 기법을 사용하여 변화를 주며 그렸다. 제일 왼쪽의 노랗게 물든 나뭇잎은 개자점을, 두 번째 나무는 호초점을, 뒤쪽의 습윤한 나무는 얇은 붓을 옆으로 뉘어 미점을, 네 번째 나무는 쥐의 발톱을 닮은 서족점을 그리고 마지막 나무는 마른 붓으로 다시 미점을 사용했다. 여러 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그린 것도 대단하지만, 가을날의 단풍을 담채로 노란색과 붉은색 그리고 푸른색이 어울리게 칠한 것이 참 좋다. 게다가 보통 남종화를 보다 보면 과한 습윤함 때문에 감정선이 마음 깊이 들어갔다 나오기 마련인데 이 그림은 엷은 먹과 더불어 대상을 무심한 듯 물기가 없는 갈필법(메마른 묵선)을 사용하다 보니 과한 감정에 빠지지 않고 가을날의 풍경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

  나이를 먹으니 알록달록한 이 가을이 더 좋다. 그러다 보니 핸드폰에 있는 사진 대부분은 꽃, 나무, 단풍뿐이다. 단풍철이라 주말 고속도로는 좀처럼 빠르게 달릴 수가 없다. 이럴 때 내가 사는 주변을 보자. 아름다움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집 가까이 공원만 나가도 빨갛고 노란 단풍잎 그리고 갈색의 나뭇잎을 볼 수 있다. 돗자리 하나 들고 공원으로 가 잠시 가족과 혹은 연인과 아니면 친구와 담소라도 나누면 어떨까? 그렇게 깊어져 가는 이 가을의 끝을 소소한 행복으로 채워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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