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 빛 위로 온통 네가 내리고

by 박소진



설운 빛 위로 온통 네가 내리고

설운 빛 위로 온통 네가 내리고


흘러가던 시간의 한 막이 내려지자, 곧 또 다른 시간의 막이 열렸다. 내 무대 위의 지난 계절의 등장인물들도 천천히 뒤돌아 나갔다. 한창 동안 초록이었던 여름의 잎들 위로 붉은색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 위로 가을의 평화가 내려 앉았다. 빛깔을 곱게 담은 잎들이 땅으로 가닿을 때 지금, 어김없이 가을이다. 제일 먼저 도토리나무가 그랬고, 서양 너도 밤나무 열매도 뒤이었다. 단풍나무의 씨앗들도 질세라 한쪽 날개를 달고 날다가 지상에 착지했다. 가을이 부드럽게 날아다닌다. 빛이 있는 날에는 몇 가지 주변적 요소만 맞아떨어지면, 보통 비슷한 감정이나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다. 그것은 긍정의 사인이다. 이때에는 절망과 우울을 명명하는 낯선 단어들이 긴 그림자로 우리를 비껴간다. 그것은 오래간만에 온 볕만큼이나 다행인 일을 닮았다.


이때에는 절망과 우울을 명명하는 낯선 단어들이 긴 그림자로 우리를 비껴간다.



거리 곳곳에 낙엽을 가득 쓸어 담은 자루들이 놓여 있다. 정원과 집 앞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가을의 낭만이 마치 쓰레기 마냥 가득 담겨 꽁꽁 묶여 있는 거 같아 조금 쓸쓸했다. 거리 곳곳이 깨끗해지는 걸 보니 오늘이 가을의 끝자락인 게 다분했다. 부러 가을산을 찾지 않아도 우리가 걷는 모든 길 위가 이 계절의 한 복판이었다. 손을 잡고 낙엽을 함께 발로 차며 걸었다. 발로 찬다는 표현보다 발을 뻗어 물을 힘차게 밀어내듯, 길 위 가득한 낙엽을 계속해서 밀며 미끄러지듯 걸었다. 아이는 늘 수다쟁이였는데, 이제 우리에게도 가끔 침묵이 온다.


침묵 다음에는 함께 즉흥시를 읊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이어 말하라며 내게 딸이 시킨다. 그래 알았어 나부터 해볼게. 뭐라 뭐라 문장을 서로 예쁜 문장이라고 좋아했다. 뭐라 했나. 그 순간을 기록하지 않으면 다시금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까워질 문장들을 툭툭 입 밖으로 서로서로 내뱉었다. 문장의 마침표 뒤에 또 이은 다음 문장이 온다. 가을이 밀려와 새 가을에 닿고, 닿은 문장은 또 가을색을 담은 빛 속으로 들어가 부서진다.


- 나는 낙엽이 가득한 가을 파도를 밀며 앞으로 나아가네.


- 지금은 가을을 모으는 시절이네


부서지는 빛의 사이사이에서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것 같이 느껴지던 게 있었다. 문득 이 장면이 미래에 어떻게 담길지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 그것은 지금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과 뺨을 보드랍게 치고 가는 색을 담은 바람의 느낌을 기억하는 일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듣고 적어놓았을까. 계절의 책갈피에 나는 어떤 종이를 끼울까.


가을이 밀려와 새 가을에 닿고, 닿은 문장은 또 가을색을 담은 빛 속으로 들어가 부서진다.


한 계절의 초록이 노랑이 되어 이내 바삭해져 지난해지면 나는 또 다음 시간의 마디에 서 있다. 온통 무르익다 너무도 빨리 허물어진 생의 계절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지난 언제였던 기억이 이내 나를 스치러 오기 때문이다. 머리를 쓰다듬는 색을 담은 바람 냄새를 맡으면서 걷는다. 기억의 조각을 담은 공기들이 잊게 된 믿음과 약속들로 바라진 색 위로 지금의 찬란한 빛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눈 부시게 날아다니는 빛들 사이에서 순간 지나는 어떤 장면들을 끼워 놓는다. 나는 여기서 너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또 너를 얼마나 미워했을까. 그리고 당신은 얼마나 더 멀어졌는가 우리 중 누군가는 얼마나 서로 아름다웠을까.


가을의 창에 나뭇잎이 살랑살랑 날아와 붙었다. 나는 또 다음의 가을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날 이런 빛이면 컴컴한 절망도 아스라이 부서져 희망에 닿겠다. 설운 빛 위로 온통 네가 내린다.



가을날 이런 빛이면 컴컴한 절망도 아스라이 부서져 희망에 닿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