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Jang Oct 08. 2024

사쿠라 재패니스 레스토랑 (3/3)

3.

금전 등록기 위에 걸린 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켰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듯 오픈하기만을 기다린, 콧수염과 턱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단골손님인 조셉이 들어섰다. 그는 유태계 미국인이었고, 맥코믹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는데,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사쿠라를 찾았다. 하루코가 조셉을 알은척하며 스시 바로 안내했다. 영란이 그에게 다가와 음료수와 애피타이저 주문을 받았다. 그녀는 주문명세서에 그린 티와 에다마메를 적었다. 영란이 대나무로 만든 찻주전자에 녹차를 담아 가지고서 손님에게로 왔다. 조셉이 수염을 추스른 후 조심스럽게 녹차를 마셨다. 녹차 방울이 그의 턱수염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영란은 이어서 굵은소금이 눈처럼 하얗게 내린 에다마메를 가져다주었다. 조셉이 능숙하게 껍질을 벗겨 콩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강 씨가 느끼하게 웃으며 그에게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물었다. 조셉이 스파이시 투나 핸드롤과 스시 디너 스페셜을 오더 했다. "I make you today happy, right now. (오늘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불완전한 영어를 당당하게 끝낸 강 씨는 잽싸게 양손을 움직였다. 제주산 돌김 위로 하얀 밥과 아보카도, 오이, 성게알 그리고 새빨간 투나가 올려졌다. 음식을 완성한 강 씨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맴돌았다. 삼십 초가 채 안돼 핸드롤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셉이 땡큐를 연발하며 강 씨가 건넨 핸드롤을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는 맛이 정말 기가 막히네요, 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강 씨는 겨우 그거 가지고 그러느냐며 스시 디너 스페셜은 감격의 눈물을 흘정도로 맛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자 조셉의 커다란 갈색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민우는 바에서 롤을 말다가 말고 고개를 돌렸다. 도시의 이곳저곳을 축축하게 적시고 잠시 사그라들었던 빗줄기 소리가 다시 점진적으로 크게 들려왔다. 일곱 시 반이 넘어가자 식당 안에는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고 테이크 아웃 주문마저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장사가 거의 되지 않아 이런 상태라면 팁이 오십 불을 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사쿠라에서는 하루에 육십 불의 팁이 웨이트리스에게 보장된 액수였기에 그나마 영란은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매달 이천 불을 모게지 페이로 내는 최여사가 투덜대며 돈을 셌다. 그녀는 생배앓는 얼굴로 육십 불을 영란과 하루코에게 각각 건넸다. 가게에 더 있다간 뇌졸중으로 쓰러질 것 같다며 최여사는 얼마 전부터 들고 다니기 시작한 루이뷔통 백을 집어 들었다. 굵은 빗줄기를 뚫고 최여사가 주차장에 있는 그녀의 볼보를 향해 뛰어 나갔다. 동동주에 취한 벼룩처럼 통통거리며 뛰던 그녀가 쫘악 미끄러지더니 앞으로 철퍽하고 자빠졌다. 부엌에서 우연히 그 모습을 목격한 식기세척의 달인 카를로스가 배를 잡고 웃었다. 민우는 오늘 같은 날에는 재즈 음악을 틀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레스토랑에 있는 열 장 정도의 CD 중에서 재즈 컬렉션을 골라 오디오 플레이어에 넣었다. 잠시 후 천장 스피커에서 조지 쉐어링이 연주한 스타더스트가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멜로디가 날아다니다가 하루코의 입술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곡이 너무 좋다고 누구의 이냐며 그녀가 민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오늘 밤도 어제처럼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기에 딱 좋은 밤 같다고 눈으로 말했다. 장님 피아니스트의 곡이라고 민우가 설명하며 하루코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루코가 그녀의 윗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니 오늘은 이만하고 매운탕에 소주나 마시자. 카를로스한테도 들어가라고 해,라고 강 씨가 민우에게 말했다. 민우는 알았다고 한 후 아쉬운 얼굴로 하루코를 쳐다봤다. 영란이 냉장고에서 소주 두 병과 세 개의 잔을 꺼내왔다. 키친에 들어간 민우는 김치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칼로 서걱서걱 썰었다. 강 씨가 테이블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올려놓자 낯익은 그들만의 장면이 또다시 연출되었다. 카운터 앞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하루코가 못내 서운한 표정으로 식당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사요나라, 그렇지만 내일은 반드시,라 민우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 씨가 매운탕을 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맛있겠다 감사합니다,라고 영란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영란은 감사합니다, 란 말을 최근에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 장실에서 나온 를로스가 이마에 손을 대며 그들에게 아디오스,라고 했다. 매운탕이 끓어오르자 강 씨 국자로 대구 살과 야채 건더기를 퍼 그릇 세 개에 담았다.

민우가 강 씨의 잔에 소주를 부었다.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밤에는 누가 뭐래도 소주가 최고야. 이 놈의 도시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이 소주라고 난 생각한단 말이지." 강 씨가 벌건 매운탕 국물을 먹은 다음 소주를 냉큼 마셨다. 그리고 자작해서 소주를 따른 그는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하는 강 씨얼굴빛이 즉시 익숙한 색깔로 변했다.     

"맞아요. 그런데 사실 이곳은 어느 술 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소주, 맥주, 양주, 와인, 어떤 술 하고든지 말이에요." 영란이 말한 다음 사발에 담긴 미더덕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장님 재즈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멜랑콜리한 피아노곡 나오고 있었다. 세 사람아무 말 없이 침묵을 안주 삼아서 소주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그들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그들 모두의 침묵이 십 분 가까이나 지속되었다. 어두운 다홍빛 얼굴의 강 씨가 소주를 마신 후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식탁에 놓았다. 그의 기름기 흐르는 미간과 인중이 동시에 움찔거리더니 그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꺼억... 이상하게 오늘은 빨리 취하는 것 같네... 아까 분명히 사과식초를 마셨는데도 이러네... 아무튼 니들 솔직히, 꺼억... 말해봐라." 강 씨의 동공은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는 오염된 저수지처럼 혼탁했다. "사쿠라에서 일하면서... 건의사항이나... 뭐냐, 애로사항 같은 거 있으면..." 강 씨는 김치냄새와 술냄새가 뒤섞인 지독한 날숨을 내뿜으며 말했다. 민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영란을 쳐다봤고 그녀도 씁쓸한 안색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어렵지 않게 강 씨의 술버릇을 눈치챘다. 한 얘기 또 한다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