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큰 사무실, 1,012일의 기록

2025년 6월 15일 – 우리는 마침내 노동조합의 거점을 갖게 되었다

by 기록하는노동자

※ 매주 토요일 발행되는 ‘버티는 중입니다 위원장의 비밀일기’ 최근 사건에 대한 일기입니다.


2025년 6월 11일, 우리 노동조합은 설립 1,012일 만에 드디어 회사로부터 사무실을 제공받았다.


단체협약, 늑약에 가까웠던 타협

지난 4월 16일, 회사는 우리와 직접 교섭하지 않고
노동조합이 교섭권을 위임한 화학연맹과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그 단체협약에 담긴 건 근로시간면제 2,000시간과 사무실 제공.
우리가 요구한 세 가지 중 체크오프는 빠졌다.

사무실은 본사도, 공장도 아닌 부천 시내 외부에 따로 마련된 공간이었다.
회사 측은 노조 사무실이 사내에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우리는 을사늑약 같은 단체협약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법에는 명시돼 있지만, 회사와 합의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유효기간은 3년, 그 뒤엔 다시 원점이다.

단체협약 승낙, 그리고 수상한 시점들

단체협약 최종 승낙 통보는
전직 대통령 탄핵 선고 30분 전에 이뤄졌다고 들었다.
사무실 제공은 처음엔 5월 중이라더니,
5월 말엔 “6월 중”이라는 말만 들었다.

그러다 6월 3일 21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고,
6월 5일에야 회사는 부천테크노파크 쌍용3차에 한 사무실을 계약했다.
(사실 이곳도 노동조합이 직접 알아보고 추천했던 곳이다.)

6월 9일, 회사는 6월 11일 입주라고 통보해왔다.
정권 흐름에 맞춘 듯한 시점들.
단체협약도, 사무실도 정권 바람을 살핀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신뢰를 쌓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에,
노조 담당 팀장님께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사무실을 인계받던 날

6월 11일, 사무실을 인계받았다.
책상 두 개, 회의 테이블 하나, 의자 여덟 개.
임대료와 관리비는 회사 부담.

하지만 인터넷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전화기도 없었다.
그 외 필요한 건 모두 조합이 준비해야 했다.
치사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회사 입장에선 그게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이쁘다고...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회사도 어떤 부분에서는 참 대단하다.

내가 채워 넣은 것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수요일, 목요일 이틀 내내 청소하고
집기들을 직접 사 왔다. 인터넷도 내가 설치했다.

캠핑용 야전침대를 하나 들여놓고,
예전에 영업사원 시절 차에 싣고 다니던 캠핑용 온냉장고를 냉장고 대신 설치했다.

화학연맹 위원장님이 보내주신 축하 화분도 도착했다.
혼자 정리한 뒤, 조합원들에게 공지문을 쓰고 있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천평만평 같은 열 평

우리는 사무실이 없어도 움직였고,
어디에 있어도 조합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를 헤매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생겼다.
함께 모여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곳.

이 작은 열 평짜리 사무실은 내 눈엔 천 평, 만 평 같았다.
매일 출근하진 못하겠지만,
조합원들의 열정과 단결은 늘 이곳에 상주할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 한 가지

이제 남은 건 6월 26일이다.
부당해고에 대한 행정소송 1심 선고가 있는 날.
중앙노동위원회는 이미 해고는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회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이 공존한다.

나는 여전히 복직을 바란다.
노조 위원장으로서가 아니라,
조합원들과 함께 숨 쉬고 일하고 싶은 한 사람으로서.

이 싸움은 내 복직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복직하더라도 풀타임 근로시간면제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출근해서 조합원들과 밥 먹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 나누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은 한 가지 문제가 마무리되어야,
우리 노동조합은 비로소 완전체로 설 수 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부터 우리의 거점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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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주
1,012일.
그 시간은 단지 견디는 시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토대를 만들고, 법과 싸우고, 사람을 모았다.
사무실은 그 싸움의 결과이자, 새로운 시작점이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이 작은 공간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권리를 지키고
노동자가 존중받는 회사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고민과 선택을 해나갈 것이다.
이 기록은 단지 나의 하루가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의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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