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앞 4대 상업거리 中 서하연과 대책란
정양문 3부작 시리즈의 그 두 번째 이야기.
(1부) 중축선과 천안문광장
(2부) 전문 밖 4대상업거리 - 서하연, 대책란
(3부) 전문 밖 4대상업거리 – 선어구, 서타마창가
“전문(정양문) 밖에는 예로부터 4대 상업거리가 있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전문대가 중심으로 서쪽에는 서하연(西河沿)과 대책란(大栅栏)이, 동쪽에는 선어구(鲜鱼口)와 서타마창가(西打磨厂街)가 위치하였다.”
서하연(西河沿/시허얜)은 중국과 서양 건축양식을 융합하여 민국시기 스타일로 만든 건축군이 있는 옛 상업 구역이다. 최근에 베이징팡(北京坊, Beijing Fun)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탈바꿈하여 세련된 식당과 까페, 상점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사진 찍기 좋은 배경들이 많아서 북경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서하연은 정양문 서쪽에 위치하며 성을 둘러싼 해자(호성하)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명대에 서하연이라 불리었으며, 1965년에 서하연가(西河沿街/시허얜지에)라 개명되었다. 명대에는 서점과 그림의 교역 중심이었으며, 청대에 농수산물 시장이 되었다. 이후에 금은방과 은행업이 성행하여 북경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민국시기에 호텔과 여관 등도 많이 건설되었다.
정양문의 대표적인 포토 스팟 – 페이지원 서점
베이징팡 구역에는 페이지원(Page One)이라는 대형 서점 체인이 있다. 총 3층으로 이루어진 꽤 규모가 큰 서점인데, 책과 문구용품 구매 목적 외에, 특히 이 서점의 2층과 3층은 꼭 방문해 볼 장소이다.
서점 2층과 3층에 거대한 유리창문이 맞이하는 전경에 감탄하게 된다. 정양문 전루 – 성루 – 모주석기념관이 일직선으로 이렇게 선명하게 잘 보이는 포토 스팟 덕에, 책 구매라는 원래 목적 외에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베이징팡, 즉 서하연 곳곳에는 민국시기 서양 건축물 유적이 남아있다. 그냥 걸어도, 그냥 아무 곳이나 카메라를 들이대어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에는 북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있다. 아름다운 외관과 내부 덕에 까페 안팎으로 항상 인기있는 장소이다. 코로나로 조금은 한적해진 풍경이다.
권업장 (劝业场/췐예창)
권업장은 1905년에 처음 건설되어, 초기에는 "경사권공진열소(京师劝工陈列所)"라 불렸으며, 중국 최초의 프랑스 유학파 설계사인 선리위안 (沈理源)이 1923년 설계하였다. 1936년에 '북경권업장 (北京劝业场)'으로 개명하였다. 청나라 말기, 이곳에는 다양한 먹거리, 의류, 놀이, 실용품 등 각종 상품이 모였으며, 옛 북경 종합 쇼핑몰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서양 바로크 건축 스타일이며, 북경 최초의 박스식 엘리베이터가 있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일찍이 '경성 상업 제1루(京城商业第一楼)'라 불렸다. 권업장은 "노력 권유, 실업 진흥, 국산품 제창"의 의미를 가지며, 한 시대의 실업강국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겸상익 (谦祥益/첸샹이)
청나라 1840년에 설립된,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품목이 다양한 비단 전문점이다. 과거 북경에는 "팔대상을 입고, 허리에는 사대항을 차야 한다 (身穿八大祥,腰缠四大恒)"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옷은 8개 가게의 제품을 입고, 돈은 4개 금융기관과 거래해야, 귀족이라 할 수 있다는 표현이다. 이 중에서 팔대상(八大祥)은 당시 가장 인기있던 패션 브랜드로서, 그 중에 겸상익(谦祥益)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즘에도 지방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비단 이불보를 구매해가는 것이 필수라고 한다. 이 곳 역시 코로나 직격탄으로 썰렁하기 그지 없다.
보항성 금은방 (宝恒祥金店)
벽면에는 Pao Heng Hsiang (보항성) / Gold & Silverware of every description / choice pearls / fine workmanship / one price only 라는 영문이 쓰여져있다.
북경 그리고 수도를 상징하는 거대한 “京”(경/징) 글자 앞에서...
"마쥐위안(马聚元)의 모자, 네이롄성(内联升)의 신발, 바다샹(八大祥)의 옷, 쓰다헝(四大恒) 은행거래"
당시 북경에서 이름 날리던 이들 가게의 물품을 몸에 걸치고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 가게들은 모두 전문 앞 주요 상업거리 중 하나인 대책란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책란(大栅栏/따자란)은 천안문광장 남측, 전문대가의 서측에 위치하며, 동서 길이 약 275m의 거리이다. 명나라 영락8년 (1420)부터 깊은 역사를 가진 곳이며 점포들이 밀집한 상업거리로 발전하였다. 대책란거리(大栅栏街)는 원래 랑방4조골목(廊房四条)으로 불렸으며, 청대 이곳은 이미 북경의 주요 상업중심이 되었다. 책란(栅栏)이란 원래 난간, 울타리를 의미하는데, 명청대에는 통행금지가 시행되어서 밤에는 거리와 골목 입구마다 커다란 울타리를 쳤다고 한다. 상거래가 활발한 이 지역은 도난 방지를 위해서 특별히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크고 높게 설치하였기에 대책란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호(字号)”는 상점, 상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노자호(老字号/라오쯔하오)’란 장기적인 생산과 경영활동에 있어 우수한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신뢰를 획득한 상점 및 그 상품에 부여되는 칭호이다. 대부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상점에 부여하는 중국 상무부의 공식 인증이다. 전문대가, 특히 대책란은 바로 이런 북경노자호의 거대한 집합체이다.
과거 인기 브랜드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옛날 핫 쇼핑 플레이스에 타임머신 타고 잠시 여행 간 듯 한 곳이 바로 이 대책란 거리이다. 눈을 돌리는 사방에 대부분 이 노자호 인증 마크가 붙어있다.
정흥덕 (正兴德/정싱더) 1738년~ 회족이 창시한 이슬람식 찻집
그리고 장일원(张一元/장이웬) 1900년~ 찻집
동인당(同仁堂/통런탕) 1669년~ 중의약방
고부리(狗不理/꺼우부리) 1885년~ 천진에서 시작된 만두가게. 식당 앞에 원세개가 서태후에게 고부리 만두를 바치는 동상이 있다.
오유태 (吴裕泰/우위타이) 1887년~ 찻집. 이 곳의 자스민차(모리화차) 가공 기술은 국가급 비물질 문화유산에 등록되어있다.
왕마자(王麻子/왕마쯔) 1651년~ 명성 자자한 가위 제작.
도일처(都一处/두이추) 1738년~ 샤오마이(小麦)
이 식당은 원래 가게 이름이 없는 곳이었는데 1752년에 건륭황제가 민간인 차림으로 순시를 나와서 늦은 시간에 문 연 식당이 없어서 헤메다가 이 곳을 음식맛을 보고는 반하여 도일처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친필로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都一处는 '이 시간에 문을 연 곳은 수도에서 이 곳뿐이다/京都只有你们这处'라는 뜻)
서부상(瑞蚨祥/루이푸샹) 1862년~ 비단가게.
1949년 천안문광장에 건 최초의 오성홍기 제작에 들어가는 노란 비단을 서부상에서 제공했다고 하여 유명해졌다. 상점 1층 입구에는 간단한 박물관을 꾸며놓아서 비단 제작 과정, 누에고치 및 당시 오성홍기를 볼 수 있다.
대관루(大观楼/따관로우) 1902년~. 영화관
중국 최초의 영화관이며, 중국 최초의 영화가 상영된 장소이다. 중국 최초의 영화는 임경태(任庆泰)가 만든 '정군산(定军山)'인데 이 대관루에서 상영했다고 한다. 영화 ‘정군산’은 1905년 제작되었으며, 삼국시대 황충과 하우연이 벌인 전투를 소재로 한 경극이 그 내용이다. 대관루는 현재에도 최신 영화를 상영하며 활발히 운영 중이다.
이 외에도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고, 전취덕 오리구이를 먹지 못하면 유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경오리구이(烤鸭/카오야)의 대명사인 전취덕(全聚德/취안쥐더, 1864년~)과, 역시 카오야로 유서깊은 사계민복(四季民福/스지민푸, 1796년~)도 있다. 북경에 여행 오면 오리구이는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인데, 두 상점 모두 북경 곳곳에 지점이 많이 있지만 이왕이면 원조격인 대책란 지점에 먹어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듯 하다.
** 조경환 <북경상점> (2013년. 생각을담는집) 책을 재미있고 유용하게 읽었으며, 내용 작성에 참고하였습니다 **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중
북경의 기억,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한 기억은 대책란의 수많은 노자호 상점들에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것 같다. 오랜 세월 영업했다고 해서 무조건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아닌 ‘노자호’ 간판이기에 자신감과 당당함도 뿜어져 나온다.
중국에 오기 전, 15년 간의 직장생활과 두 아이의 엄마로서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간혹 여유 시간이 생기면 아이들 눈높이의 여행을 다니거나 사람들과 맛집에서 회식하는데 대부분을 썼다. 내가 한국을 떠나 있는 시간 동안 한국도 변했겠지만 나 또한 나이를 먹으며 변했다. 오래된 것, 자연의 모습에 눈길과 마음이 가고, 특히 걷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한국에서도 오래 된 노포가 더욱 많이 유지되고 인정받고 존경받기를 바래 보며, (이미 그렇게 되고 있을 수도..) 한국에 오래된 곳을 찾아 실컷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