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으로 사랑 읽기,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환-상’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신 적 있나요? 저는 그 영화하면 꼭 배우 조정석 님의 한 대사가 생각나요. 키스에 대하여 물어보는 배우 이제훈 님에게 조정석 님이 덧붙이며 이야기하는, 그 사랑 속의 '환-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첫사랑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한국 영화이기도 하죠. 배우 배수지 님이 이제훈 님의 짝사랑하는 음대생으로 나오는 것을 보며, 친구들과 “음대생은 매일 연습실에 짱 박혀 있지... 때문에 절대 누군가의 짝사랑 대상이 될 수 없음”이라고 막무가내로 결론 내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의 환상을 잘 담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첫사랑, 유독 환상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기도 하죠. 첫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영화 건축학개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거나 실패하는 짝사랑의 기억으로 끝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사랑의 설익은 감정이 많은 예술에 귀감이 되는 거겠죠?
오늘의 작곡가 베를리오즈도 '짝'사랑의 환상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초보 음악가였던 베를리오즈는 스미드슨이라는 프로 여배우를 보고 환상을 꿈꾸는데요. 그녀가 출연한 작품을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베를리오즈는 그녀에게 매료되어, 자신의 사랑을 담은 편지를 여럿 썼지만, 야속하게도 그녀에게선 답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듯, 베를리오즈의 짝사랑도 그 시작이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던 듯합니다.
사랑의 환상은 빠져나오려고 해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강렬함은 미지에 있을수록 더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보지 못한 길에 후회도 그래서 생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도, 삶도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어쩌면 당연하죠.
베를리오즈는 그 아쉬움을 연료로, 스미드슨의 관념에 더욱더 깊이 빠져 듭니다. 스미드슨에게 매료된 사랑을 재료로, 음악에 더욱 깊이 빠지는 데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고정악상입니다. 베를리오즈는 표제음악이라고 하는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기악곡에 고정악상이라는 작곡기법을 도입했는데요. 고정악상은 관현악곡 내에서 특정 인물을 암시하고 음악외적인 줄거리를 전개하는 역할로써 고정되어 나오는 선율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아는 죠스의 빠-밤, 빠-밤, 이 선율도 고정악상의 기법을 사용한 예이죠.
오늘 다룬 환상교향곡은 '어느 예술가의 생애'라는 부제로, 그가 짝사랑했던 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을 염두에 두고 고정악상을 사용했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환상에 지독히도 시달렸던 베를리오즈 자신의 사랑을 투영한 곡인데요. 47초에 바이올린 선율로 처음 등장한 스미드슨의 고정악상은, 전 악장에 걸쳐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배치됩니다. 여러분도 마음을 썼던 사랑의 기억을 떠올려 보시고, 악장별 이야기에 따라 다르게 운용되어 곳곳에 숨겨진 스미드슨의 선율을 발견해 보시길 바랍니다.
1악장은 꿈과 정열, 2악장은 무도회, 3악장의 전원의 풍경, 4악장은 단두대로의 행진, 5악장은 마녀들의 밤잔치의 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전개됩니다.
먼저 시작을 여는 1악장. 사랑하는 여인의 형상이 꿈에 나타납니다. 그러던 중 2악장 무도회에서 꿈에 그리던 그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3악장에서는 사모하는 여인을 뒤로하고 떠난 전원에서도 그녀의 생각을 놓지 못하는 걸 깨닫습니다. 4악장에서는 전원을 떠난 후 꾼 꿈에서 그녀가 단두대의 이슬로 변하는 상실의 경험을 겪습니다. 5악장에서 죽음을 맞이해 버린 그녀는 이내 마녀가 되어 주인공을 괴롭힙니다. 사랑의 환상을 가져다줬던 여인이, 이제는 나를 괴롭게 하는 악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사랑의 환상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사랑의 환상을 따라 지나온 자리에 남은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안타까움과 아쉬움, 아니면 증오? 어쩌면 그 모든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의 첫사랑도 “꺼져”라는 말로 거칠게 종결했듯,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의 환상도 그녀를 결국 마녀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사랑의 환상은 거칠게 끝이 나지요.
모든 사랑의 끝이 아름다우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요. 살벌하게 다투며 헤어지기도 하고, 매일 보던 누군가가 하루아침에 다시는 볼 용기가 나지 않는 누군가가 되기도 하고요. 또 어떤 때에는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의 4악장처럼, 시간이 흐르면 단두대의 이슬처럼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증오의 기억이 되기도 합니다.
비단 연애 관계에서의 사랑뿐만 아니라, 친구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지나온 자리에는 사랑의 환상과 기쁨도 있지만, 아쉬움, 허탈함, 무상함 등 많은 감정을 남기지요.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도 할 말이 많은데, 사랑의 그 많은 감정을 설명해 줄 정답도, 오답도 없는 무언가無言歌의 예술이, 우리의 마음을 오래도록 알 수 없게 어루만져주기 때문에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서의 사랑 또한, 그가 떠난 후에도 그 자리의 악상이 되어 마음을 지키고 있다는 게 뜻깊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스미드슨으로 시작된 고정악상은 짝사랑에 불구했던 스미드슨을 실제 아내로 맞이하게 도왔고요. 무명 작곡가에 불과했던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후일 바그너의 음악극과 현대 영화음악에서 많이 쓰이는 라이트모티브라는 기법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에 불과했던 짝사랑, 결국 스미드슨과의 사별로 안타까운 결말을 내리긴 했지만, 음악적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스미드슨에게 답장을 받지 못해 애태웠던 그 사랑의 환상이,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이 대단한 교향곡을 만들었다는 아이러니는, 우리의 사랑이 남겼던 많은 자국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해요.
사랑의 기억이 여러 정취를 남기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요. 결국 지나고 나면 사랑의 감정도 증오의 감정도 삶의 어딘가에서 문득 떠올라 그 출처를 알 수 없이 변용되는 악상의 결로 나타날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이별에 더 덤덤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리적 시간은 끝날지언정, 지나온 사랑이 남긴 환상의 자취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여러 자국을 내가며, 끊임없이 변용되는 고정악상으로 흐르고 있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 삶울림 lifecho____
사랑 : 정취 = 음악 : 고정악상
ㅣ고정악상이라는 것은 음악 속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관념을 나타내주는 것. 사랑도 순간적 환상에서 기인하지만, 사랑이 끝난 후에도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기억, 습관, 새로운 다짐 등의 모습으로, 이제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삶의 익숙한 정취로.
P.S. 글을 쓰며 여러 생각을 했지만, 유난히 John Mayer - You Gonna Live Forever in Me를 지울 수 없었던 삶울림이었어요.
♫ Johan Mayer - You Gonna Live Forever in Me
"... Life is full of sweet mistakes, And love's an honest one to make, Time leaves no fruit on the tree, But you're gonna live forever in me..."
- 추천 음반/연주 정보
정명훈 지휘,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2013
https://www.youtube.com/watch?v=5HgqPpjIH5c
- Claudio Abbado 지휘, Chicago Symphony Orchestra, 2003
https://youtu.be/lMxXD8wthlg?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