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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경 Nov 02. 2023

서른 살 동생이 이별을 고했다

10월 13일. 서른 살 아름다운 청년이자 우리 가족의 사랑둥이 막내가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했다.



나른한 오후 업무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려던 그때 카톡 알림이 울렸다. 우리 막내다.

고작 20분 거리에 따로 살고 있지만 연락은 서너 달에 한 번이나 했을까. 이 녀석의 갑작스러운 연락이 무척 반가웠다.


"누나 미안해. 못난 동생 챙겨줘서 고마웠어…"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불길한 느낌이 사실이라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다 괜찮다고, 아무 일 아니라고.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떨리는 손으로 엄마에게 전활 걸어 동생을 찾았다. 얼굴이 마비된 것 마냥 발음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절규에 가까운 소리만 질러댄 것 같다. 동생은 집에 없었다. 친구들도, 여자친구도 전날부터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다. 내 인생엔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일 말이다. 패닉 상태에 빠졌다. 112에 신고를 했다는데 이렇다 할 연락이 없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곧장 동생 방에 들어가 PC를 켜고 휴대전화 위치를 조회하려고 보니 이상하리만치 깨끗했다. 녀석이 이미 흔적을 지운 모양이었다. 차라리 모든 게 나의 억측이라면 좋았으련만.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한참 머뭇거리더니 119가 발견했다고 한다. 이미 늦었다.




힘든 일 뒤로하고 편히 쉬고 싶다며 떠난 동생과 달리 남아있는 가족들은 매일이 고통이다.


한평생 무교였던 가족들이 종교를 찾기 시작했다. 어떤 신이든 제발 우리 막내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빌었다. 두 손을 모으고 절실하게 기도했다. 밤마다 동생이 좋아했던 커피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의 영혼이 다녀가길 빌기도 했다.


때론 막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굴기도 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서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막내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귀여워하고, 웃고, 회상했다. 사소한 행동들과 습관까지 기억해 내며 하하 호호 웃기도 했다.


그러다 각자 방으로 돌아가면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워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 용돈을 많이 주지 못한 인색함부터 마음을 챙겨주고 보듬어주지 않았던 무심함까지 순간순간이 후회와 자책이다.


서른 살 그 꽃 같은 청춘이 안타까워 서럽다.

남들보다 즐기지 못했던 삶이어서 애통하고 처절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뼈저리게 아프고 고통스럽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동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향해 손을 잡아준다. 수십 번, 수백 번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를 구한다. 힘든 내색 않던 그 묵묵함 뒤로 얼마나 깊은 상처가 있었을지.. 이 모자란 누나는 그저 절실한 상상에서나마 동생의 시간을 붙잡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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