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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경 Nov 20. 2023

"T발 C야?" 죽음과 이별의 동상이몽



서울에서 일하는 둘째 동생은 퇴근할 때마다 내게 전활 걸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매일 걸려오는 전화가 귀찮을 때도 있지만,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받아주던 게 하나의 일과가 됐다.


둘째의 전화는 막내 동생의 죽음 이후 잦아졌는데, 전활 받지 않으면 크게 놀라 격양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별에 서투른 둘째는 내게, 그리고 엄마에게 전활 걸어 대화하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울었다. 일도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매일 의미 없는 대화로 1~2시간씩 채우고 나면 좀 나아질까 싶지만 또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이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몰라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남은 이들을 잃고 싶지 않은 듯한 공포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둘째가 듣고 싶었던 말과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그의 이런저런 말에 "현생 살아"라는 식의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이런 내게 둘째는 말했다. "T발 C야?"


특히 동생은 내가 막내의 죽음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며,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좋은 말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안 된다. 


실제 부모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갈등이 있으면 침묵으로 일관하며 수동적 공격을 퍼붓다 화해랄 것도 없이 대화를 겨우 텄고, 자식에겐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다. 그래서일까. 막내에게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며 부모에게 화살을 돌렸다. 막내의 마지막 마음이 어땠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가족끼리 똘똘 뭉쳐보자고 했건만..

결국 둘째와 나는 서로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당시 스스로를 '칼'이라고 표현했다.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짜증이 온몸을 지배하며 누군가 툭 건드리면 마치 칼을 휘두를 것처럼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막내는 이미 가버렸고, 이제 와서 말해 무엇하냐'는 반발심도 적지 않았다. 눈물이 터질 때쯤 콧속이 매워지는 것도 싫고,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도 싫은 나머지 막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나 날선 말들을 쏟아내며 슬픔을 감췄다.


염세적이고 시니컬한 태도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다. 유튜브에서 가족의 마지막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을 보며 '제정신이 아니네'라고 손가락질하던 나였는데, 이건 뭐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관종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한참을 괴로워하다 이런 내 태도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 '원망과 책임 전가 그리고 분노'의 과정이라고 한다. 고인의 사망에 대한 원망의 대상이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을 때 모든 원망과 책임을 생전 갈등이 있던 지인이나 가족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한다. 자살예방센터가 왜 있나 했더니. 한줄기 빛이다.


갑자기 툭 터진 눈물에 한참을 울다가 지칠 때쯤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이것 역시 슬픔에서 비롯된 감정임을 인정하면서 누군가에게 향한 칼을 이만 거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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