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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나 Sep 25. 2018

나에게 묻는다
- 소설 <딸에 대하여>

매거진 나이이즘 Vol.1

*소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난 네 엄마야. 젊은 날은 정말 잠깐이다.
어느 날 돌아보면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금방 늙어 버려.
그 때도 너 이렇게 혼자 있을 거니? 104p


소설 위 활자가 세상에서 가장 친숙하고도 지겨운 목소리로 자동 변환된다. 흠칫.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쪼그라든다. 60대 엄마의 시선으로 딸의 세계를 그린 소설 <딸에 대하여> 속 모녀 관계는 현실의 나와 내 엄마 모습과도 많이 닮았다. 특히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지 않는 딸, 뼈 빠지게 공부시켜놨더니 번듯한 직장 명함으로 기를 살려주기는커녕 불안정해 보이는 일자리를 전전하는 딸, 사사건건 세상에 불만을 드러내며 딴죽을 걸고 긴 가방끈 휘두르며 엄마를 가르치려 드는 딸은 너무도 고스란히 내 모습이다.

덕분에 소설 곳곳이 존재하지도 않는 엄마의 일기장 같다. 이제 머리가 커버린 딸에게 하고픈 말을 다 쏟아낼 수 없어, 백 마디 중 한마디 내뱉고 남은 아흔아홉 개의 말을 써 내려간 그런 일기장.


소설 속 엄마의 입장은 훨씬 더 당혹스럽고 복잡하다. 대학 강사로 일하며 전국을 떠돌던 딸은 어느 날 그마저도 동료의 부당해고에 맞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심지어 경제적 문제로 자신의 동성 연인을 데리고 엄마 집으로 들어오면서, 외면하려 했던 딸의 성적지향을 기어이 직면하게 만든다.


평생 가부장제 바깥으로 벗어나 본 적 없기는 매한가지일 소설 안팎의 두 엄마에게, 이유는 다르지만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지 않는 딸의 삶은 당혹감과 죄책감, 수치심 등이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안긴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들이 품은 가장 큰 정서는 다름 아닌 염려일 것이다. 자신들이 어떠한 보살핌도 해줄 수 없는 어느 시점이 왔을 때, 아직은 젊음을 믿고 까부는 저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직면하게 될 황폐하고 끔찍한 현실에 대한.


‘젠’은 그런 엄마의 염려가 고스란히 투영된 인물이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의 담당 환자 젠은 여러 나라의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며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노년에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입원한 젠에게는 찾아오는 가족도, 진심 어린 관심을 가지는 이도 하나 없다. 젠의 살이 썩어 문들어져도 요양원 관계자는 비품 아끼기에만 급급하고,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는 요양보호사들은 모른 척 눈을 감고 고깃덩어리처럼 환자를 대한다.


그마저도 젠 앞으로 들어오던 후원이 줄자 요양원은 젠을 ‘종일 수면제를 먹이면서 죽음을 기다리는데 남은 생을 죄다 소진시키는’ 열악한 시설에 내다 버린다. 철저하게 방기되는 노년의 비참이 너무나 생생한 질감으로 그려져, 두려움이 절로 오스스 돋아난다.



좁고 갑갑한 고독 속에서 늙어 가는 사람. 젊은 날을 타인과 사회,
그런 거창한 것들에 낭비하고
이젠 모든 걸 소진한 다음 삶이 저물어 가는 것을
혼자 바라봐야 하는 딱하고 가련한 사람.
내 딸이 그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다. 104p


주인공의 시선에 비친 젠은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평생을 허비한 사람.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 하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정해진 수순처럼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

그런 젠의 현재는 마치 딸의 미래처럼 보인다. 사회가 정한 정상성에 순응하지 않는 딸. 가족도 아닌 ‘남 일’에 나서서 싸우는 딸. 젊은 날 젠이 그러했듯이, 딸은 경계선 바깥으로 벗어나고 다시 그 바깥의 중심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는 두렵다. 자신의 딸이 젠처럼 가족의 보살핌조차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갈까 봐. 젠의 삶은 무시무시한 경고 사이렌을 울린다. 삐- 경로를 이탈했으니 당장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시오. 안 그러면 나처럼 될 테니.


그러나 한 인간이 최소한의 존엄성조차 지키지 못하고 죽어간다면 그것이 과연 개인의 실패일까. 그렇다면 결혼과 출산이라는 이른바 ‘정상’ 수순을 거친 지금의 노년 세대는 왜 빈곤과 고립 문제를 겪을까. 모든 불편함과 부당함에 모른 척 눈 돌리고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해 살면 과연 안온한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소설은 무언가를 바꾸기보다는 ‘무료하지만 안전하고 무력하지만 차분한 일상’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엄마를 어떤 세계의 가운데로 몰아 넣으며 끊임없이 엄마에게, 그 너머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엄마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고 있는 딸의 세계를, 가족이라는 울타리 바깥의 연대와 돌봄을, 한 사람의 마지막을 폐기처분하듯이 내팽겨치는 사회의 행태를 목도하면서 서서히 깨닫는다. 모른 척 치워버리면 된다고 여긴 모든 ‘남의 일’이 결국은 ‘내 일’임을. 딸의 미래를 위해서는 딸의 삶을 억지로 경로 변경할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쪽을 택해야 함을. 결국 엄마는 오랜 삶의 관성을 역행해 일하던 요양원까지 그만두며 열악한 시설에 버려진 젠을 집으로 데려오고, 젠은 엄마의 돌봄 속에서 눈을 감는다.


이쯤에서 인정하자. 소설 속 모녀 관계는 비슷할지 몰라도, 소설 속 딸과 나는 닮지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아마도. 싸우는 삶보다는 무력하지만 안전한 일상, 누군가 대신 싸워 쟁취해주는 안온을 바라왔던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울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197p


아득한 내일이 아닌, 마주 선 지금과 싸우기 시작한 소설 속 엄마는 이제 내게 묻는다. 사회의 규격 안에 너를 구겨 넣는데 골몰하는 삶과 규격을 넓히고 바꾸려는 삶, 어느 쪽이 너의 내일을 지켜줄 것 같냐는. 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을.


text 은37 (나이이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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