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운수 나쁜 날?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여행 스타일에 따라 느끼는 여운은 분명 달라진다.
처음에 나의 여행 스타일은 ‘급함’과 ‘욕심’이었다. 어린아이들의 체력은 상관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계획을 무리하게 세웠다. 아내의 까다로운 취향도 상관하지 않고 값싸고 비위생적인 호텔이나 민박을 선택했으며, 욕조나 냉장고가 없는 경우에는 아이들이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는 일방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여행 독재자였다.
어느 날, 부활절 기간의 방학 동안 우리는 독일을 거쳐 체코 프라하까지 자동차를 몰고 간 적이 있었다. 출발하는 아침부터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채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도 만들고 배낭도 내가 챙기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평소의 자기 루틴대로 천천히 움직이며 시작하고 있다. 결국 ‘버럭’ 화를 내고 나서야 운전대를 잡고 여행을 출발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다음부터 이럴 거면 정말 여행 안 갈 거야! 좀 마음에 여유를 가져 봐.”
과속과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고, 아이들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차 안에서 퀴즈 대회를 했다. 그렇게 독일 국경을 지나 달리다가 어느덧 휴게소에 들렀다. 그런데, 아들 허니는 갑자기 오락을 하고 싶다며 동전을 달라고 하여 같이 가 보았더니 큰 슬롯머신 2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린이가 하는 오락이 아니라고 타일르면서 아내와 나는 커피와 크루아상 빵을 샀다. 하지만, 허니는 어떤 아저씨가 계속 코인을 넣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화면을 옆에서 함께 바라보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난 하는 수 없이 5유로를 넣어서 허니와 으니에게 한 번씩 교대로 버튼을 눌러보라 하였다. 매우 흥미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옆의 아저씨는 투덜대며 게임을 멈추고 나갔고, 그 순간에 으니가 눌렀는데 화면에 같은 그림이 5개 연달아 멈추더니 숫자가 한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간다. 뭔지 몰라도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라 좋아했는데, 으니가 옆에 있는 베팅을 눌러버렸다. 결국, 으니는 블랙과 레드 버튼을 연속 번갈아 3번을 눌렀고 모두 기괴한 소리와 함께 8배의 점수로 올라갔다.
난 당황해서 어떻게 할지 모르고 있는데, 멀찍이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던 아내가 서서히 다가오더니 머신 구석에 있는 별도 버튼을 누른다. 신권인 유로화가 자그마치 160유로가 나오더니 아내 지갑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난 그제야 으니가 큰 일을 치렀다는 생각에 급하게 마무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차 안에서 딸 칭찬을 목이 쉬도록 하면서 즐겁게 내내 달렸다. 참 운수 좋은 날이라 생각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한참을 달려 체코 프라하의 민박 아파트에 도착했다. 너무 장거리라 한밤중이었고, 아이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나는 빨리 정리하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짐을 트렁크에서 내려 숙소로 이전시키고 돌아와서 트렁크 문을 닫았는데.... 아. 뿔. 사.
자동차 키를 트렁크에 넣은 상태로 트렁크 문을 닫은 것이다.
문을 열 수가 없어 보험사 담당자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보험사 측은 즉시 출동 서비스가 없다 하였고, 주변 공업사 연락처라도 보내 달라하였더니 전화번호 하나를 한참 후 보내줬다. 결국 1시간 후 보안 기사가 오더니 3분 만에 특수장비로 문을 열고 트렁크에 있는 키를 꺼내 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는 그에게 비용을 물었는데 깜짝 놀랐다. 160유로를 현금으로 달라는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본전이라 했던가... 낮에 으니가 슬롯머신에서 한 건 올린 것을 고스란히 앞에 있는 이 기사에게 내줘야 한다니... 참 운수 나쁜 날이었다.
2년쯤 지났을 때, 내 여행 스타일은 많이 변해 있었다. 아내가 배낭을 직접 싸고 호텔도, 비행기도 아내가 예약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오히려 나는 아침에 유부초밥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옷을 입혔다. 이제 내 여행 스타일은 ‘느긋함’과 ‘편안함’이었고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마지막 여행이었던 포르투갈 포르토에서는 아무 계획 없이 아내가 하자는 데로 따라다니기만 해 봤다. 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포기하니 마음이 편했다.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디테일을 천천히 볼 수 있었고, 아름다은 풍경을 감상하며 사진에 담을 수 있었으며, 일몰 앞에서는 넋이 나간 듯이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크로켓을 먹으며 한적히 걷다가 갈매기가 내 손의 크로켓을 낚아 채 가더라도 미소로 받아주는 여유까지 생겼다. 비로소 그때 깨달았다. 발 길 닿는 데로 가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며, 그 한가로움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여행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