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갖춘마디,
언젠가는 갖춰야겠지?

살다 보면 나중에 남은 박자를 완성해야 할 것들이 있다.

by 미스터 킴

어렸을 때 음악 시간에 배웠었던 '못갖춘마디',

무슨 뜻일까?


'박자표에 만족하는 박자 수를 갖지 않는 마디로 주로 곡 시작에 사용된다. 못갖춘마디로 시작한 경우 박자표에 해당하는 나머지 박자 수를 마지막 마디에서 채운다'

라고 Daum 백과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즉 4/4박자인데 1박자로 시작했으면,

마지막 마디는 3박자로 끝내줘야 한다.


우리 사는 모습에서 모든 것이 '갖춘마디'로 깔끔하게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에게 어렸을 적에,

분명 '못갖춘마디'로 남아있던 분야들이 있었다.

중학생일 때 선생님이 성적표를 배부하면

항상 나의 음악과 미술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결코 소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춘기 때의 이유 없는 반항심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여성인 미술 선생님 P는 깍쟁이 스타일의 외모에 비록 매는 자주 안 들었지만,

언어 폭행의 최첨단 선구자였다.

그 당시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남녀공학 학교였는데

아래와 같은 수치스러운 꾸지람을 들었다.


"넌 정말 별 수 없는 놈이구나, 너 같은 구제불능은 여기 있을 자격 없어. 당장 나가서 손 들고 있어."


얼굴이 빨개져서, 식은땀이 맺혀서, 맘 속으로 좋아했던 여학생 앞에서 도저히 창피해서

복도로 나가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었다......

난 아직도 그 치욕스러웠던 기억이 잔상에 남아 있다.


하지만, 미술 선생님도 충분히 화가 날 만했다. 왜냐하면, 난 미술 준비물을 연속해서 한두 달간 챙겨가지 않았다.

스케치북도 짝꿍 것을 한 장 뜯어서 스케치하는 척하며 시간만 흘러가길 바랬으며, 찰흙(점토)도 사지 않아 선생님이 옆으로 지나갈 때에만 짝꿍 찰흙을 일부 떼서 만지작 거리곤 했다.

물론 수수깡도 미리 옆 반 친구가 만들어 놓은 것을 빌려 재활용해서 뭔가를 만드는 시늉만 했을 뿐,

결코 돈 주고 사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굳이 설명하자면, 가난한 우리 집 형편에 난 음악, 미술에 비싼 준비물을 사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오히려, 준비물을 위해 받은 용돈을 친구들과 삼치기(동전 따먹기)하는 데 사용해서 소득창출 활동을 해

집에 모아 두곤 했다.

작은 방 장판 밑에 동전들을 숨겨놔서 엄마가 걸레질을 하다 결국 발견하셨지만 말이다.

나중에 담임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를 따로 학교에 부르셨고, 난 그 이후로 맘에 내키진 않아도

미술 준비물을 잘 챙겨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평생 미술과는 거리를 두고 살 줄 알았는데,

30대 중반에 우연한 기회에 '수채화 동호회'에 들어가 점심시간 때마다 한 시간 동안 집중해서 그림을 그렸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계기는 정말 '미술에 구제불능'인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구제불능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은 오기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렇게 마음이 평온할 수가 없었다.

몰입과 끈기 있는 기다림 후에 오는 완성된 수채화 작품의 만족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난 1년 동안 스케치, 정물화, 풍경화 등을 이젤에 올려놓고 배웠으며 일부 작품은 지인들에게 선물까지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붓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언젠가는 이 '못갖춘마디'로 시작한 그림 그리기를 마지막 마디에서 남은 박자 수로 마치고 싶다. 중년이든, 퇴직 후이든, 아니면 실버타운이나 병원에 있을 때든 못다 배운 그림의 세계를 완결 짓고 싶은 마음이다.


난 또한 대학 신입생 때 통기타 동호회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어 하나쯤은 꼭 배우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그 동호회에 분위기 좋은 여신급 여자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MT에서 강촌 밤의 달빛 아래서 '별이 진다네' 노래를 통기타 치며 부른 남자 선배에게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 동호회 이름은 '못갖춘마디'였으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마음으로

난 통기타 실력을 못 갖추고 불쑥 나와 버렸다.


한편 벨기에 생활 2년 차를 지날 때쯤 한동안 시무룩했던 나에게 문득 아내가 아래와 같이 제안을 했다.


"내가 배우는 피아노 선생님 있잖아.

그분 남편이 브뤼셀 시립 오페라 악단 멤버래.

그분이 한국인인데 성악 한 번 배워볼래?"


그 제안은 마른 사막에 내리는 단비 같았다.

평소 기분 좋을 때 난 가족들 앞에서 '오 나의 태양',

'보리밭' 등의 가곡을 자주 부르곤 했다.


'Oh, So le mio. Na nur na de sole... '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니~임 부르는 소~리 있어...'


아내는 나름 내가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난 바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성악 과외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한국과 다르게 내가 과외 선생님 집으로 직접 가야 하며, 현금으로 매회 과외비를 줘야 하며, 시간도 과외 선생님 일정이 변경되면 그에 맞춰야 한다.

하지만, 열정을 갖고 배웠으며 미래의 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에 취해있곤 했다.


파바로티 도밍고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을 부르거나,

'10월 어느 멋진 날에'를 나지막이 읊조리는 나의 모습......


수많은 사람의 박수 속에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퇴장하는 내 손 흔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나중에 딸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멋진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아니면, 퇴직 후에 뮤지컬 동호회 활동을 하다가, 불현듯 주연 배우로 발탁되는 환상까지 감히 가져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역시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내겐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충분한 개인 발성 완성을 위한 지루한 시간 투자가 필요했다. 난 주 1회만 하기 때문에 내 발성이 좀처럼 개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것도 그 날만 생각날 뿐, 1주 지나면 다시 내 실력은 원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즉 집중적으로 훈련을 하지 않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생각과

빨리 파바로티 수준으로 가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결국 6개월도 안 돼서 성악 실력을 못 갖추고 끝내고 말았다.

그에 반해 아내와 아들 허니는 2년 넘게 꾸준한 피아노 학습으로 적정 수준의 경지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씁쓸했다.


가끔 음악 공연을 볼 때마다, 미술관 전시를 다녀올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항상 '못갖춘마디'란 단어가 마음속을 둥둥 떠다닌다.

수채화도, 성악도 내가 못다 한 박자를 언젠가는 갖춰야겠지?

아예 음악, 미술에 소질이 없다면 시도하지도 않았고 포기하는 게 맞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언젠가는 꼭 마무리짓고 싶다......


사실상 이런 수채화, 성악 등의 취미뿐 아니라, 인생에서 목표로 했던 수많은 일 중에 '못갖춘마디'로 진행 중인 것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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