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 페일 에일 (India Pale Ale)
인도이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던 1700년대 후반, 맥주 빚기가 어려울 정도로 더운 인도의 날씨 때문에 영국인들은 고향에서 만든 맥주를 인도로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습한 영국의 기후에 어울리는 독하고 구수한 포터 (Porter) 맥주는, 마치 한여름에 마시는 시나몬 라떼처럼 인도의 열대 기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략 6개월이 걸리는 긴 항해를 견디지 못해 상하거나 김이 빠지는 맥주 투성이었다. 당시 영국의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을에 빚어 오랜 기간 숙성하는 ‘10월 맥주’, 혹은 ‘보리 와인 (Barley wine)’이 유행했다. 오래 숙성하기 위해 알코올 도수가 높았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 (Hop)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적도를 두 번 통과해야 하는 인도로의 가혹한 항해를 견디기에 적합한 맥주였다. 다량의 홉으로 인해 강한 쓴맛을 가졌던 이 맥주는 인도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카레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맥주, 인디아 페일 에일 (India Pale Ale; IPA)는 이렇게 탄생했다.
한국에는 말린 식재료가 많다. 힘겨운 겨울을 지나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은 음력설과 함께 찾아온다. 파릇파릇 올라오는 여린 봄나물의 새싹을 뜯으며 선조들은 새로운 한 해를 다시 시작할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산나물은 조금만 자라도 먹을 수 없을 만큼 질기고 써지기 때문에 한 번에 뜯은 나물은 알뜰하게 말려서 두고두고 먹는다. 말리는 과정에서 깊어지는 감칠맛은 덤이다. 이렇게 쓴맛은 방부제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오랜 기간 두고 먹는 저장 음식과 함께했던 친숙한 맛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쓴맛을 싫어한다.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에 대한 선호는 높은 열량을 가진 음식을 찾는 인간의 본능에서 기인한다. 산업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열을 이용한 살균법, 통조림, 냉장, 냉동, 다양한 방부제로 인해 쓴맛 없이 오랜 기간 음식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어느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맛, ‘달짠'. 그렇게 산업화된 음식에서는 쓴맛이 사라졌다.
쓴맛이 적고 청량감 가득한 라거 맥주는 오랜 기간 낮은 온도에서 숙성해야 하므로 과거 서늘한 알프스 지역에서만 생산할 수 있었다. 차게 마셨을 때 맛있는 라거 맥주는 냉장 기술의 발달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지금 한국의 대기업 맥주와 같은 라거 맥주의 시대가 열렸다. IPA는 영국 본토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과거 맥도널드에서는 쇠기름으로 감자를 튀겼다. 마치 고기를 먹는듯한 감자튀김의 감칠맛의 비밀이었다. 이렇게 튀겨진 감자튀김은 햄버거보다도 많은 콜레스테롤을 함유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1980년대부터는 식용유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고기 맛을 내는 식품첨가물을 넣음으로써 맥도널드의 감자튀김은 예전과 비슷한 맛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식품첨가물의 발달은 모든 음식에서 소고기의 향이 나는 패스트푸드를, 바나나보다도 더 바나나 같은 과자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쓴맛을 접할 일이 없어지며 쓴맛은 종일 끓인 패스트푸드점의 커피, 잘못 조리해서 타버린 음식과 같이 신선하지 않은 음식의 상징이 되어갔다. 동결 건조한 블랙커피의 쓴맛은 설탕과 크림으로 가려야만 하는 맛이 되었다.
쓴맛은 복잡하다.
신선한 원두를 볶는 냄새는 새삼 ‘원두 콩’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그 고소한 풍미, 블루베리, 산딸기, 레몬을 연상시키는 신선한 산미와 함께 은은하게 퍼지는 쓴맛은 가려야 하는 불청객이 아니라 미각을 깨우고 돋우는 화려한 조연이다. 생카카오가루를 입힌 트뤼플(truffle)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굴리면 카카오의 독특한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이어지는 버터의 풍부함과 단맛의 조화는 질리지 않는 섬세한 풍미를 자아낸다.
단맛은 설탕, 짠맛은 소금, 신맛은 산, 감칠맛은 글루탐산, 지방은 지방산. 많아야 2가지 정도의 수용체에 의해 감지되는 다른 맛들과 달리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는 알려진 것만 43가지이다. 대개의 식물은 병충해나 다른 동식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쓴맛을 낸다. 인간에게는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하는 다양한 쓴맛. 그 다양한 맛을 감지하기 위해 수많은 수용체가 발달하였을까?
다시 인디아 페일 에일로 돌아가 보자. 자취를 감추었던 IPA는 1980년대 미국 수제 맥주와 함께 부활한다. 미국산 홉 ‘캐스케이드’의 상쾌한 솔향과 산뜻한 시트러스 향은 멸균하지 않은 맥주의 풍부하고 신선한 맥아의 단맛과 어우러져 너무나 낯선 맥주를 만들어내었다. 아무리 맥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그동안 마셔온 맥주와는 다른 맥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Respect your elder: keep cold, drink fresh, do not age! Respect hops, consume fresh! Do not save for a rainy day! Pliny is for savoring, not for saving! Consume pliny fresh, or not at all!
‘맥주를 존중하세요: 차갑게 보관하고, 신선할 때 마시고, 오래 보관하지 마세요! 홉을 존중하세요. 우울한 날을 위해 보관하지 마세요. 플라이니는 즐기기 위한 맥주이지 보관하기 위한 맥주가 아닙니다! 신선하게 마시던지, 아니면 아예 마시지 마세요’
- '플라이니 디 엘더’ 맥주 라벨.
지금 따라놓은 한 잔의 더블 IPA (double IPA), ‘플라이니 디 엘더’ 맥주는 정확히 일주일 전에 생산되었다. 마치 포도 주스와 같은 과일 향, 상쾌한 레몬 향, 은은한 조청의 달콤함… 맥주의 보존 기간을 늘려주는 방부제 역할을 했던 홉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홉을 많이 넣은 맥주는 그 어떤 맥주보다도 신선할 때 빨리 마셔야 한다. 신선한 쓴맛은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손만 뻗으면 고열량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대.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쓴맛을 음미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쓴맛은 기름지거나 단 음식의 풍미를 돋우고 질리지 않도록 식욕을 자극한다. 음식에 맛과 재미를 더한다. 쓴맛을 느끼는 수용체는 혀뿐만 아니라 내장에도, 코에도, 허파에도, 뇌에도 있다. 온몸으로 느끼는 유일한 맛, 쓴맛.
그렇게 쓴맛은 인생을 닮았다.
신선한 커피, 초콜릿, 그리고 맥주의 쓴맛. 눈으로 마시고, 향으로 마시고, 입안의 감촉으로 마시고, 목을 타고 넘어간 후 입안과 코를 채우는 풍미로 마시는 쓴맛. 삶을 음미하듯 쓴맛을 음미하자. 쓴맛을 음미하듯 삶을 음미하자.
인디아 페일 에일 (India Pale Ale; IPA)에 대하여
이제는 '향기나고 쓴 수제맥주'의 대명사가 된 맥주의 한 종류. IPA 의 흥망성쇠는 ‘대영제국'의 역사,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709년 다비 1세 (Abraham Darby I)는 석탄을 높은 온도로 가열해 나쁜 냄새와 연기를 내는 휘발 성분을 제거한 ‘코크스 (cokes)’를 개발한다. 당시 영국의 맥주는 장작불에 구운 맥아를 사용하여 짙은 갈색이나 검은색을 뗬으며, 구수한 보리향이 강했다 (포터 혹은 스타우트라 불렸다). 이에 반해 냄새가 나지 않는 코크스를 이용해 구운 맥아는 그을음이 적어 산뜻한 맛과 색을 내었다. 이 맥아를 사용하여 만든 ‘연한 에일 (pale ale)’은 이렇게 등장했다.
1700년대 후반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하던 동인도회사. 근처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던 호지슨 (George Hodgson)은 우연한 기회에 (아마도 동인도 회사의 항구와 가깝다는 이유로) 인도로 보급하는 맥주를 납품하게 된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홉이 많아 보존성이 높았던 이 맥주는 훗날 인도로 수출하는 페일 에일, 인디아 페일 에일 (India Pale Ale; IPA)이라 불리게 되고, 곧 선풍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바람은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폭풍이 되어 유럽 대륙을 뒤흔든다. 당시 품질 좋은 포터와 스타우트를 러시아에 수출하던 버튼 온 트렌트 (Burton-on-Trent) 지역의 양조장들은 순식간에 러시아로의 수출길이 막히게 된다. 새로운 시장을 찾던 이들은 인도로 눈을 돌린다. 석고 (Gypsum; CaSo4) 함량이 높은 버튼 온 트렌트 지역의 물은 산뜻하고 깔끔하며 풍부한 홉 향을 지닌 IPA를 만드는데 안성맞춤이었고, IPA의 인기는 이제 인도뿐 아니라 호주, 북미, 카리브 해까지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짧은 전성기를 뒤로하고 1800년대 후반 ‘시원한 라거’의 시대가 열렸지만, IPA는 여전히 영국 본토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심각한 물자 부족을 초래하였고, 높은 도수의 맥주에 대한 증세, 독일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 등으로 20세기의 영국 맥주는 다시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한다.
대영제국과 함께 꽃 피우고 사그라졌던 영국의 맥주들은 뜻밖에도 20세기 말 대서양 너머 미국에서 부활한다. 최초의 미국 페일 에일인 엥커 브루잉 컴퍼니 (Anchor Brewing Company)의 리버티 에일 (liberty Ale), 크래프트 맥주의 양대 산맥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 (Sierra Nevada Brewing Company)의 페일 에일, 최고의 IPA로 손꼽히는 러시안 리버 브루잉 컴퍼니 (Russian River Brewing Company)의 플라이니 디 엘더 (Pliny the Elder)까지. 하지만 IPA 또한 많고 많은 맥주 스타일 중 하나일 뿐이다. 너무 써서 싫더라도 실망하지는 말자. 이제 백 가지 종류의 맥주 중 한 가지를 맛보았을 뿐이니까.
참고문헌
Pete Brown. 2009. Mythbusting the IPA. All About Beer Magazine. 30(5).
William Bostwick, How the India pale ale got its name. 2015. Smithsonian.com
Jennifer McLagan, Bitter: A taste of the world’s most dangerous flavor, with recipes. Ten Speed Press, 2014.
에릭 슐로서 저, 김은령 역. 패스트푸드의 제국. 에코리브르, 2001.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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