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말 '어느 날 갑자기'...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전화, 듣고 싶지 않은 말

by 온작가


2019년 10월 췌장암 선고를 받고 20여 차례 항암치료를 한 후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평범한 일상을 살고 계시는 우리 아빠. 하지만 암 환자와 가족들이 있는 카페 또는 채팅방을 통해 늘 듣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모든 게 다 좋아져서 정말 잘 지내고 계셨는데 갑자기 나빠지셔서...'


저는 그 '어느 날 갑자기'라는 말이 너무 두렵습니다. '가장 무서운 암'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췌장암. 타 장기들 속에 숨은 장기이기에 암의 발견 자체가 힘들고, 그래서 수술을 할 수 있는 게 정말 행운이라고 하는데... 그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 이들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재발' 그리고 '전이'라는 무시무시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과물을 받아 들게 되는 일이 적지 않더라고요. 그것도 대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저에게 항상 따뜻한 아빠였습니다. 초등학생쯤부터 글쓰기로 두각을 드러냈던 막내딸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셨고 그때쯤부터 '작가'라고 정해놓았던 막내딸의 장래희망을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해 주셨지요. 항상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 사는 덴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하셨고, 단 하루도 빠짐없이 두껍고 어려운 책들을 탐독하는 모습으로 책 읽는 삶의 모범을 직접 보여주셨어요.


물론 모든 게 다 좋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빠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고 불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었어요. 혈기 왕성했던 시절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큰 소리를 자주 내곤 했는데, 그 대상은 늘 엄마였습니다. 최소한 제게는 '억지스러운' 사유들로 시작된 아빠의 화, 엉뚱한 방향으로 파생돼 가는 아빠의 분노, 엄마의 한숨 (엄마는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단 한 번 같이 싸운 적도 없었다)... 유쾌할 리 없는 그런 '소리들'은 나의 유년 시절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스무 살, 이제 정말 방송작가가 되겠다고 홀로 상경했고 아빠와는 한두 달에 한 번 만나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러니 나쁠 게 없었어요. 막내, 서브작가를 거쳐 한 10년 차 작가가 될 때까지만 해도 집에 내려갈 때 일거리들을 잔뜩 싸들고 갈 수밖에 없었고 새벽까지 일을 하다 정오를 한참 넘기고서야 겨우 일어나는 막내딸을 못내 안쓰러워했던 아빠. 잘하고 있다, 잘할 수 있다, 네가 최고다... 늘 그런 말들로 내 작은 어깨에 힘을 가득 실어주곤 했었습니다.


아빠와의 유일했던 갈등은 아마도 결혼과 관련된 거였던 걸로 기억해요. 나이가 한참 차고도 결혼 생각이 없던 딸에게 아빠는 '흔한 아빠들의 흔한 잔소리'를 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아무래도 귀에 딱지가 앉을 거 같아 두 번 세 번 할 전화를 한 번으로 줄이기도 했었어요.


다행히 처녀귀신은 면한 막내딸의 결혼식에서 우리 아빠를 아는 모든 이들은 '그렇게 귀한 막내 결혼하는데 대성통곡하시는 거 아니냐'는 추측들을 쏟아냈지만 아빠는 조금도 울지 않았고 약간 긴장했으며 많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또 어느 날 갑자기 잠시 왔던 아기가 떠나갔고, 또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온 아기가 무럭무럭 잘 자라 무사히 세상 빛을 보고...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끔찍이도 사랑한 막내딸이 세상에 내놓은 보물 같은 생명체가 사람이 되어가는 동안 암환자로 사는 아빠의 시간도 빠르게 흘렀어요. 다행히 큰 위기 없이 20여 차례의 항암을 잘 견디셨으며 의사의 허락 하에 항암을 쉬고 있는 지금도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하실 정도로 '별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는 아빠. 늘 머리 아픈 정치 경제 역사 등에 관한 두꺼운 책만 파고들던 아빠가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에 빠지고, 주말드라마 <신사와 아가씨> 때문에 제 전화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건 무척이나 반가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아빠가 암과 싸우는, 아니 암과 사이좋게 동행해 가는 방식일 테죠.


그러나 늘 무섭습니다. 바로 어제까지만도 아무렇지 않게 통화했던 아빠가 아주 많은 다른 환자들처럼 '갑자기' 나빠지게 될까 봐... 닥치지도 않은 일, 뭘 미리 사서 걱정하냐 하겠지만 다수의 환자들이 바로 오늘도 보여주고 있는 삶이 아빠 인생에 미리 정해져 있는 '모범 답안지' 일 것만 같아 무서워요. 늘 무섭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의 암이 사라지고 '어느 날 갑자기' 완치 판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갑자기'가 가능하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암 환자 꼬리표를 떼고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하루를... 내게는 매일 찾아오는 그 '흔하고 뻔한' 별일 없는 일상 중 며칠을 뚝 떼어 아빠에게 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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