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취약한 MBTI
1. 우울증과 성격의 상관관계 (3)
"우울증에 잘 걸리는 MBTI가 따로 있지 않을까?"
한 때 MBTI 유행으로, 나의 모든 사고과정이 기승전 MBTI로 귀결될 시기에 나는 우울증을 한참동안 앓았었다. 16가지 유형들의 특징을 다 꿰고 있고, 모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원인을 MBTI로 분석하던 나는 자연히 내가 앓고 있는 우울증과 MBTI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증과 MBTI는 크게 연관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특정 MBTI이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분석한 <오늘도 우울증을 검색한 나에게>의 저자인 이재병 정신과 전문의는 오히려 우울증에 걸린 후에 MBTI를 측정해보았기 때문에, 우울증 증상이 ISFP나 INFP와 같은 특정 성향처럼 보여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서술했다.
실제로 나는 우울증 전후의 MBTI가 달랐는데,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때에는 INFP가 나왔었다. 인프피의 주기능과 부기능은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본인 감정에 대해서 깊이 고려하는 것과(내향 감정)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들을 고민해보는 것인데(외향직관) 그런 행동들이 내 주된 우울증 증상들과 유사했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 나는 하루종일 하는 일이 내가 왜 우울한지, 왜 모든 것들이 다 재미가 없는지, 왜 무기력한지, 왜 불안한지 등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을 만큼 '실패하면 어떡하지'에 대한 공포가 매우 커서 내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생각해서 각각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나열해냈다.
예를 들어, 내가 시험 공부 중인데 시험을 예상보다 못 보았을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내 취업에 영향이 가고, 그렇게 되면 어떤 직업을 선택하게 되며, 그 직업 연봉은 얼마가 되고, 그럼 그 중에서 저축할 수 있는 자금은 어느 정도이며, 그 자금으로는 노후를 얼마나 힘들게 보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분석해보았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플랜 B, C, D, E, F를 세웠다.
우울증이 어느정도 나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왜 그런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을 했을까 싶지만, 이는 불안과 초조, 무기력증, 무가치감, 집중력 저하라는 우울증 증상들의 결과물이었다. 결국 이렇게 하루종일 부정적인 생각만 하느라 정신적 에너지가 다 소모되어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일을 실천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나를 자괴감에 빠뜨리고 자기효능감을 떨어뜨리게 했다. 이러한 반복적인 굴레에 갇혀 결국 이 고민들을 전부 다 끊어내고 싶다는 생각과 세상 살아가는게 너무 힘들다는 느낌이 들어 극단적인 자살 사고까지 이어졌다.
잠시 내 얘기로 샜지만, 결국 우울증과 MBTI의 관계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울증은 MBTI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격, MBTI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우울증 증상들이 보이면 "내 성격은 원래부터 이래서 우울한거야"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바로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7년간의 정신적 고통과 뒤늦은 치료로 인한 3년간의 약 복용 기간, 그리고 총 500만원의 입원비가 들었다. 조금 더 이를 빨리 깨닫고 치료를 일찍 시작했더라면, 적은 약과 치료비로도 덜 고통스럽게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었던 나는 정신과에서 첫 진료를 보기까지 약 4년의 시간이 걸렸다.
먼저, 가장 큰 오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울증이 내 성격 문제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내가 내향적이라서, 내가 적응을 잘 못해서, 내 의지가 나약해서, 멘탈이 강하지 못해서 등 내 선천적인 성격 때문에 내가 힘든거니까 내 성격을 억지로라도 바꾸면 해결될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두번째로, 정신과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두려웠다. 학창시절 때까지만 해도 누가 정신과를 다닌다고 소문이 나면, 괜히 사람들이 그 친구를 피하곤 했었다.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 정도로 상식 밖의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만 가는 곳이 정신병원이라고 어른들께 들었다. 그런 편견 때문에 주위에 도움을 구하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추후 취업에 문제 생길까봐 병원을 가지 못했다.
세번째로, 정신과 약과 치료비에 관한 걱정이 있었다. 정신과 약은 한번 먹기 시작하면 약에 대한 의존성이 너무 커지는 부작용이 있으니, 최대한 처음부터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잘못된 상식을 자주 들었었다. 그리고 정신과 진료비는 엄청 비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틀린 생각들이었다.
먼저, 우울증은 성격 문제가 아니라 그저 신체를 아프게 하는 질병이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고, 무릎을 다치고, 어디 베이면 쓰라리듯이 우울증도 신체기관인 뇌에 호르몬 혹은 신경전달물질이 일정량에서 벗어날 때 생기는 질병일 뿐이다.
두번째 생각도 잘못되었다. 어느 누구든 감기에 걸려서 내과를 갈 수 있듯이, 정신적으로 힘들면 누구든 정신과에 내원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우울증 유병률 1위, 자살률 1위, 치료율 최저인 이유는 바로 이 잘못된 편견 때문일 것이다. 취업의 경우에도 어느 기업이라도 개인의 병원 진료 기록을 조회할 수 없으며, 이를 조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세번째 역시 의사들은 대체로 의존성이 높은 약물을 쉽게 우울증 환자들에게 처방해주지 않는다. 부작용이 가장 적은 약물부터 소량으로 복용을 시작하게 해서 본인과 잘 맞는지 살펴본 다음에 약을 결정하고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한다. 또한, 정신과 진료비는 생각보다 그렇게 비싸지 않다. 다른 병의 경우에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우울증을 진단받았던 나는 보통 20분간의 진료 상담과 1주-2주간의 약 처방을 합하면 보통 1만원-2만원 내외였다. 정신과 병원만 7-8곳 이상을 다녀봤는데 전부 다 그랬다. 그리고 방치했다가 나중에 병을 더 키워서 필자의 경우처럼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고 큰 치료를 받을 바에는 하루빨리 진단받고 치료를 일찍 시작하는 것이 천배, 만배는 낫다.
이처럼, 사람들이 정신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모두 극복하고 우리나라 우울증 잠재 환자들이 하루 빨리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았으면 좋겠다. 특히 우울한 기분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확실하지 않아도 일단 진료 받으러 병원에 가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미리 진료 날짜를 예약하고 첫날에 여유롭게 검사할 시간만 마련해둔다면 결코 정신과에 대한 진입장벽은 높지 않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본인의 오해와 편견이 평생의 건강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