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고민하는 당신에게
2. 취업과 우울증 (2)
힘들게 취업을 했건만, 퇴사가 마려운 순간들은 한두번이 아니다. 나 역시 대기업 인턴 채용과 정규직 전환을 위해 한 회사에서만 시험과 면접을 7번을 보았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겨우 합격이 되었고, 운이 좋아서 신입이 들어가기 힘든 대기업 그룹 총괄 전략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은 해외영업이었지만 '내가 언제 대기업 그룹을 총괄해보는 일을 해보겠어'하는 생각으로 커리어의 첫 단추를 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룹 전략팀은 이름만 조금 있어보일 뿐, 실상은 텅 빈 알갱이었다. 그도 그럴게, 기존 담당자들이 전부 퇴사하고 새로 채용된 경력직들로만 채워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우리 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 회사만의 특성이 무엇인지, 관련 업무 담당자들은 누구인지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자체로 방황하는 팀도 팀이지만, 신입이었던 나의 입장도 굉장히 난처했다. 그룹 전략팀에서는 어느정도 자회사에서 실무를 몇년간 쌓고 적어도 차, 부장급은 되어야 다른 자회사 직원들도 리드하고 임원급들에게도 직접 보고를 할 수 있었다. 같은 동기들 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어린 축에 속했던 내가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는 업무를 맡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새로 오신 팀원들은 각자 맡은 업무도 겨우 적응하고 계셨기 때문에 마땅히 내 사수 역할을 해주실 분이 안 계셨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이 차이가 많은 차장님, 부장님들께 도움을 일일이 청하기는 힘들었다.
대기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체계가 안 잡혀있으면, 차라리 스타트업처럼 자율성이라도 있으면 좋았을텐데 그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도 눈치보느라 그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애초에 '신입은 아무것도 모르는거야. 상사들이 하는 일을 보고 배워.'가 유일하게 나에게 명확히 내려진 업무 지시였다.
무엇이든 주도적으로 일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너무 답답했다. 근데 이것이 내가 답답해해도 되는 문제인지 몰라서 더 힘들었다. 대기업은 원래 이런가? 신입들은 처음에는 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건가? 나의 본격적인 첫 사회 생활이었으니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비교군이 없었다. 또래 친구들도 아직 취업을 하기 전이었고, 주변에 대기업 전략 업무를 하는 선배도 없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확실했던 것은 나와 달리 회사 동기들은 사수에게 본격적으로 인수인계를 받으며 업무를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툭하면 슬럼프가 찾아왔었다. 3•6•9 법칙이라고, 3개월 6개월 9개월마다 크게 무기력증이 찾아왔었다. 겨우겨우 출근해서 회사에서 하는 일이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어차피 이 회사에 오래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할 에너지도 없었다. 이 증상은 점차 심해져서, 회사에서는 심리적 압박감에 말을 못하는 무언증이 오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말을 해야하는데, 직급과 나이 차이가 많은 분들 앞에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해보려고 더듬거리다가 포기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하염없이 노트북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루는 주변 부서 직원 분이 우리 팀 부장님께 찾아와서 김은아 사원은 원래 말을 안하시냐고 대놓고 물어보시기도 했다.
그렇게 그 팀에서 인턴 기간을 제외하고 1년을 채운 뒤 퇴사를 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울증이 심해진 것 때문에 입원이 필요하여 휴직을 먼저 한 뒤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1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는 나만의 퇴사 기준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나는 (1) 내 적성에 맞는 일인지, 적어도 내가 싫어하는 일은 아닌지 (2) 내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인지 (3) 내가 배우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곳인지, 이 3가지 기준을 두고 퇴사를 결정하기로 했다.
먼저, 내가 싫어하는 일을 알게 되었다. 적성은 좋아하고 잘 맞는 일이 무엇인지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더 쉬운 방법은 내가 싫어하고 안맞는 일을 알고서 그 선택지를 지워나가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일, 높은 직급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기분에 맞춰 사회생활하는 일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기업 전략팀은 특히 후자의 업무가 많았다. 이런 일들을 접하게 되면, 나는 쉽사리 의미를 잃고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직업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째, 나에게 더 잘 맞는 조직 문화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스타트업과 대기업을 모두 다녀보면서, 수직적이고 나이 차이가 많은 계급이 있는 조직보다는 수평적이고 어느정도 나이 차이가 적은 조직이 훨씬 일하기가 쉽다고 느꼈다. 내가 더 쉽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곳에서는 마음이 편할 뿐만 아니라 일의 능률도 훨씬 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속가능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조직 문화는 맞지않는 일보다도 큰 스트레스로 내 정신 건강을 갉아먹었다. 잘 맞는 조직 문화를 찾아서 최대한 일 외에는 신경쓰고 힘들게끔 하는 요소를 없애고자 했다.
셋째로, 나의 성장 가능성을 고려했다. 물론 어느 곳에서든 사람은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성장해서 이루고 싶은 모습, 내가 목표하고자 하는 방향과 맞는지는 다른 얘기다. 나는 성장 가능성을 판단할 때 크게 두가지를 살펴본다. 먼저,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주변 선배들의 모습이다. 나도 몇 년 후에는 그 선배들처럼 일하고싶은지, 그 자리에 있고 싶은지 등을 생각해본다. 또 하나는 내 커리어를 통해 이루고 싶은 가치와 비교해본다. 사람이 회사와 같은 조직에서 일할 때의 장점은 개인으로 일할 때 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한 일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충분히 이 조직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지 고려해보는 것도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글로벌 사업을 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경험들인 해외 고객 상대 및 영업, 해외 시장 분석 및 신규 시장 진출, 사업 전략 및 운영 등에 대해 배워나가고 있는지 스스로 검토해보았다.
사실 무슨 일이든지 욕심 없고, 어디서든 잘 적응하며 별다른 커리어 목표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느 곳이든 퇴사를 하지않고 오래오래 다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이란 깨어있는 시간 중 절반을 차지하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일에 대한 욕심이 컸기 때문에 나름대로 생각해낸 기준을 두고 퇴사를 결심하고, 새로운 회사를 골랐다. 잘맞는 회사를 찾기까지 여러 시행착오와 3번의 퇴사 경험이 뒤따랐지만 그래도 점점 내 커리어 이상향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퇴사는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다. 나 또한 대기업 퇴사를 2번이나 하면서 주변에서 크게 만류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어느 경험이든 가치 없는 것은 없다. 퇴사를 하지 않아도 버티면서 얻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고, 퇴사를 하면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며 본인과 맞는 회사를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타이밍이다. 퇴사를 두려워해서 안맞는 회사에서 오래 버티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것보다 그 전에 본인만의 기준을 세워서 결단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다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일인데, 세상의 수많은 회사들 중 어느 한 곳에만 붙들려서 본인의 소중한 삶을 망치게 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퇴사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든다면, 주변 사람들 말보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실행했으면 좋겠다. 내 경험상 후회도 그쪽이 훨씬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