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남편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
요 근래 계속 잠 안 자고 안 먹고 떼 부리는 아이 두 명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어제도 야근하고 들어온 남편을 붙잡고 한참을 이야기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서운한 것이었다. 머리로는 일이 있어서 야근을 하고 온 남편이 이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너무 필요했던 그 순간 남편이 내 옆에 없었다는 것이 서운했던 것이다. 남편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고 내가 너무 힘든 순간 남편도 나와는 또 다른 힘든 순간들을 견디면서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럼에도 마음은 쉬이 부드러워지지가 않는다.
오늘 남편이 늦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그러려니'하는 마음을 가졌다. 이럴 때마다 서운해 할 수도 없고, 서운한 감정을 표출 한다한들 남편이 일부러 늦게 오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서운하고 힘든 건 변함없었다. 겉으론 쿨한 척했지만 내 마음은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아이들을 힘겹게 재우고 나면 분명히 저녁을 먹었음에도 허기진 느낌이 든다.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오늘도 배는 고픈 것 같은데 살찔까 봐 먹기는 싫고, 그래도 그냥 잠을 자기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남편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했다.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은데 집에 시원한 음료수가 하나도 없어. 맥주를 마실까 싶지만 왠지 살찔까 봐 무서워. 그런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기도 하고? 아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너무 말도 안 되고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정확하게 무엇을 사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이 확실치도 않은 상황을 그냥 주절주절 이야기한 것이다. 결국 남편은 집에 올 때 편의점에 들려 낑낑거리며 내가 말한 것들을 다 사 왔다. 시원한 탄산수, 커피, 아이스크림..
그런데 들어온 남편을 보니 심상치가 않았다. 많이 취해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나를 위해 이걸 사 온 것이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취해서 힘들었으면 그냥 오지'라는 마음이 들면서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나는 잠깐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남편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종알종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너무 힘든지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아닌가.
너무 힘든데 내 이야기는 들어줘야 할 것 같고, 술 취해서 죽겠고.. 남편도 이런 딜레마에 빠져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안쓰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낼모레 결혼기념일인데 계획 하나 없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고(쌍둥이 엄빠가 무슨 결혼기념일을 챙기겠느냐만은..) 술 먹고 힘들어하며 내 이야기도 못 들어주는 남편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남편은 나를 보며 "내가 힘들어하는데 안쓰럽지는 않아?"라는 말을 했다.
나는 너무 복잡한 심정이었고 또 서운함이 최근 계속되어 왔었기 때문에 "나도 힘들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무 힘든데 당신을 어떻게 위로하고 생각하겠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힘든 만큼 남편도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는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모질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설령 내가 더 힘들더라도 내 입장만, 내 감정만 중요하게 여기면 안 되었었는데. 나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버리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는데.
'내가 힘들다'
'내가 너보다 더 힘들다'
이런 생각과 말은 나를, 그리고 상대방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 것일까. 상대방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진 채로 하루하루 겨우 살아내고 있는 요즘, 참 속상하다. 부끄럽다. 미안하다.
내가 힘든 만큼, 내가 보듬어주길 바라 왔던 것만큼 남편도 나에게 그걸 원했을 텐데. 어찌 나는 당연히 이걸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주는 것은 인색했던가. 설령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외롭고 속상하고 힘들지라도, 먼저 손 내미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남편 정말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