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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프씨 Mar 15. 2024

작고 어린, 곤졸은..

수상소감과 더불어..


"사십여 년 만에 찾아간 곤졸은 당황스러우리만큼 작고 왜소한 모습이었습니다.

바다처럼 넓어 보였던 저수지는 한눈에 담고도 남을 정도로 아담했고, 물고기를 잡고 멱도 감았던 냇가는 물이 말라 온통 잡초 고랑이 되어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뱀을 만나게 해 준 돌담은 무너졌는지 쇠로 된 둘레로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아빠가 나고 자랐던 시골집은 폐가처럼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초라하게 남겨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그러다 최근 아빠를 흙으로 보내드려야 하는 큰일을 겪은 후 아빠를 기억하는 글을 적고 싶었고, 발인을 위해 사십여 년 만에 곤졸을 다녀온 후 최종적으로 제목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수정하는 내내 나의 옛 모습에 어렸을 아빠를 투영하며 글을 적어나갔습니다. 꽤 자주 울컥하였고 나와 합쳐진 작고 어린 아빠를 상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빠, 감사합니다.

막내딸의 그리움을 좋게 읽어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오 년 사이 많은 일들이 태풍처럼 지나갔다.

코로나로 견인된 전 세계 팬데믹과 그로 인한 회사와 가정의 경제적인 타격. 

고3 큰애에게 일어났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던 한바탕 소동과 마음의 상처, 그로 인한 스트레스.

우여곡절이 지나고 결정된 대학입학.

그리고 연이은 아빠와의 이별..

내 인생에는 이제 기쁘고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작정인가 싶을 정도로 포악한 일들이 태풍처럼 몰아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끝에 있던, 아빠가 찍어준 그 마침표를 밟고 돌아서니 어느새 태풍은 지나갔는지 해가 비치는 듯 따스해지고 있다. 내게 닥친 포악한 것들을 마치 모두 안고 사라져 주신 것처럼.

 

아프셨던 아빠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다. 아직 한국 집에 계신 엄마도, 언젠가는 그러실 거다.

나 역시 떠날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역시 그럴 것이다.

그 시점을 결정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하지만 떠날 때까지 이르는 길이 걷기 편한 포장도로일지 툭하면 발에 걸리는 것들이 널린 비포장 도로일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 몫이다.

이 길이 더 편할 거야.. 가족이 아빠를 위해 고민 끝에 결정했지만 막상 들어서고 보니 예상한 돌멩이들보다 더한 뾰족한 칼날들이 곧추 세워져 있는 고통의 길이었다.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전진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그 길 위에서 아빠는 베이고 찢기고 소멸되어 가셨다.


근거리에서 그 고통을 지켜보며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던 가족들과 달리 타지에 산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추웠던 겨울. 들어와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타지 사는 죄인들이라고, 해외에 사는 자식들이 부모의 임종을 보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일상을 접고 급히 한국에 도착했는데 막상 그 사이 상태가 호전되어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둥지를 튼 타지에 돌아와 일상을 시작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또 연락이 온다. 

가셨다고..


온 식구가 다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기에 항공비며 학교와 직장 스케줄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로, 대부분의 해외에 거주하는 죄 많은 자식들은 임종을 포기하고 장례식 참석을 목표로 한다. 그나마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산다는 걸 감사히 여긴다.

와야 할 것 같다는 오빠의 연락은 아빠의 임종이 거의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만 먼저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법칙 같지 않은 그 법칙은 나에게도 적용되어 한국에 들어간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남은 가족이 장례를 치르러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몹시 추웠던 2023년 1월, 아빠는 결국 고통을 끝내셨다. 

장례식 첫날은 정말 많은 눈이 내렸다. 결혼하자마자 타지로 나온 나는 이십 년 만에 사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명절을 제외하고 그렇게 다 모이건, 정말 이십 년 만이었다. 아빠가 만들어 준 자리였다.


정신없이 큰일을 치르고 난 뒤 나는 다시 현재를 살아가고 있던 자리로 날아갔다.

하늘을 날아 돌아온 현실의 내 주변은 너무나 평온했다.

뭔가 큰 풍파와 돌풍을 겪고 흐트러진 머리와 상처를 안고 돌아왔는데 타지라는 거리감 때문인지 그런 나와 이곳의 모습은 꽤나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아빠를 떠올리면 한동안은 눈물밖에 흐르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떠올리고 우는 것 말고 아빠를 기억하고 싶었다. 이 평온하고 느린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판을 두드리는 일밖에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아빠를 모시러 내려갔던 아빠의 고향은 익숙한 듯 낯선 모습이었다.

이곳을 보여주고 싶으셨구나.. 이걸 보라고 날 이끄셨구나.. 

아주 희미한 기억을 바탕으로 브런치에 썼던 글을 다시 수정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때 점화됐다.

아빠를 기억하고 싶었던 시간 동안 난 이전의 글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어린 내가 기억하는 그곳이 나처럼 어렸던 아빠가 지냈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그곳이 그냥 아빠 같았다.

흙이 되어 돌아간 아빠의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 대신 다시 글을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제목을 붙일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담아 수정한 글을 이곳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보내고 여름 방학을 맞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리고 바쁜 한국에서의 일정 중 생각지도 못한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손에 들고 욕실에 들어갔던 나는 그곳에서 메일을 확인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물을 크게 틀어놓고 중얼거렸다. 아빠, 감사합니다...


큰 공모전도 아니고 많이 알려진 단체도 아니다. 대단한 이력의 분들이라면 이런 공모전에서 수상했다고 눈물까지 흘린 내가 유난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이번 수상은 글을 써도 된다는 아빠의 허락을 받은 느낌이랄까..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시작해 보라고 출발선을 그어주신 것 같달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브런치라는 곳에 씨를 뿌려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감사하다.

처음 써서 보냈던 수상 소감도 그래서 이곳에 남겨보고 싶었다.


사실 이 글은 브런치 입성 후 초창기 브런치북을 만들어 볼 목적으로 쓴 10회짜리 글이었다. 그렇다 보니 분량이 좀 되는 글이었고, 정해진 규격이 있는 공모전에는 그 길던 부분들을 최대한 자르고 오려 붙여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회차엔 그 잘려나간 내 살 같던 부분들을 다시 엮으려 한다. 사라졌던 아재의 스토리를 다시 소환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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