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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프씨 Mar 15. 2024

작고도 어린, 곤졸

(5)

당숙네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전화기가 있는 집이었다. 할머니는 사람이 있건 없건 전화할 일이 있으면 당숙네 들러 마루 끝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곤 했다. 이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요할 때 와서 쓸 수 있는 그런 전화기였다. 유나가 저수지까지 걸어 나갔던 그 날 할머니는 당숙네 들러 큰아들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걱정 말어. 첨엔 맨날 밖으로 뛰나가서 질질 울더니 이자 좀 괜찮여. 이...”


“힘드신데 괜히 보냈나 싶어요. 힘드시믄 연락 허세여”


“니들 육 남매를 키웠어. 힘들기는.. 꼬맹이 하나 보는 기 무신 일이라고..” 


“소꿉 장난감 좀 챙겨갈 걸 그랬어요. 왜 가져가냐고 물어볼까 봐 못 챙겼는데..”


“장난감이 뭐 필요햐. 지천이 다 놀이턴디..”


“지들 자랄 때랑은 달라여. 우리 때나 들로 산으로 나가 놀았지 요즘은..”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육 남매를 키웠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거나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같이 놀아줬던 기억은 더더욱 전무했다. 애를 낳고도 며칠 지나지 않아 툭툭 털고 일어나 밭일을 나갔던 시절이었다. 채 스물도 되지 않아 큰 애를 낳았으니 어리고 젊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생각했다. 아이들을 낳긴 했지만, 그 애들이 자라는 동안 한 일이라고는 밭에 나가 땅을 메고, 때마다 명절을 치르고, 여덟 식구 뒤치다꺼리와 끝도 없는 집안일들이었다. 봄이다 싶으면 금방 여름이 왔고 가으내 정신없이 일을 끝내면 성큼 겨울이 와 있었다. 달력에 표시해 놓은 온갖 대소사를 하나씩 치르는 사이 날짜는 세지 않아도 그렇게 일 년씩 훌쩍훌쩍 지나갔었다. 육 남매는 고맙게도 밥만 차려놓고 나가면 지들끼리 먹고, 놀고, 싸우고, 자며 나름의 하루를 보냈다. 집 밖이 다 놀이터였고 돌멩이가 장난감이던 때였으니까. 문득 할머니는 육 남매에게 해준 거라곤 삼시 세끼 밥상이 전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정말 지들끼리 자라 어느새 어른이 되어 하나둘 도시로 떠난 거였구나.. 싶었다.


“막내라 버릇도 없고 고집도 세요. 버릇없이 굴면 무섭게 혼도 내고 하세요”


“고집 없는 애들이 어딨다고. 엄마 아빠 싹수가 착해서 버릇없게도 안 햐. 걱정 말어”


“방학하면 바로 내려갈게요. 또 전화 주세요”


“이 그랴. 알았으. 걱정말어.. 이 이...”


할머니는 수화기를 입에서 떼고서도 걱정 말라는 말을 계속하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침 용이 아재가 땔감으로 쓸 마른 나뭇가지를 지게에 잔뜩 지고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셨슈- 에고 되다”


용이 아재는 지게를 내려놓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고 평상에 걸터앉았다. 자식 대부분이 다 도시로 떠난 이 마을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젊은이 중 하나였다.


“가만, 용이 삼촌 올해 몇 살 먹은겨..?”


할머니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 용이 아재를 보자 뭔가 깨닫지 못하던 사실을 깨우친 양 눈을 반짝였다.


“갑자기 지 나이는 왜유. 이제 지도 서른 됐슈. 허허...”


“서른이믄 아적 새파랗네... 요즘 일은 많은 겨...?”


의도가 진한 질문을 던지며 할머니는 슬그머니 용이 아재의 눈치를 살폈다.


“뭐 농사일은 다 끝났고, 이자 겨우내 뗄 땔감 실어 날르구 있슈. 와 뭐 시키실 일 있으셔유”


“그게... 엊그제 우리 큰애가 왔다 갔잖여..”


“들었슈. 뭐 하나 놓고 갔다든디..”


할머니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큰애네가 왜 막둥이를 놓고 갔는지, 지만 떨어뜨려 놓고 간 걸 알고 유나가 며칠째 어쩌고 있는지, 고해성사하듯 줄줄 그간의 일들을 풀어놓았다. 사실 할머니에게 유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귀한 손녀였다. 하지만 그 예쁜 손녀딸을 어떻게 돌봐야 하고 놀아줘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육 남매는 지들끼리 치고받고 하며 컸다지만 덩그러니 혼자 맡겨진 유나는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요즘 애들은 다르다는데, 육 남매 때처럼 그냥 둔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용이 아재를 보니 늙은 자신보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지가 근디 뭘 하고 놀아줘유?” 


용이 아재는 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못하겠다고 펄쩍 뛰지도 않았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한 할머니였다.


“뭘 하든 늙은이보단 낫겄지. 인자 나는 애 업는 것도 죽겄어. 쬐깐한 게 은근히 무겁드라고. 이, 목말 태워주면 되겄네 목말”


할머니가 의견을 어필하는 사이 용이 아재도 생각에 잠기는 표정으로 시선을 멀리 던졌다.


“동네라고 뭐 볼 것도 없고.. 저수지나 구경시켜주고 냇가서 물고기나 잡아줘야 하나...”


“이 그랴 그랴, 그럼 되겄네. 내가 그물도 맨들어 줄 겨. 젊은 사람이라 진짜 다르네”


할머니는 용이 아재의 말에 찬사를 보냈다. 


“흠.. 알았슈. 재밌어할지는 몰르겄지만 지가 한 번씩 델꼬 댕길게유”


할머니는 연신 그랴그랴 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했다. 용이 아재가 한 번씩 놀아준다니 지고 있던 어깨의 짐이 반쯤 덜어진 것만 같았다. 애 셋 키우며 장사해서 먹고 살기가 녹록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었다. 막내 좀 맡겨도 되냐는 아들의 말은 그저 잠시 힘들어 투정 부리는 말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할머니도 가볍게 받아쳤다. 마음대로 하라고. 솔직히 진짜 이렇게 애를 데리고 와 떼놓고 갈 줄을 몰랐다. 막내둥이를 남겨놓고 조용히 짐을 챙겨 떠나는 아들 내외를 보며 어지간히 고되구나 싶어 마음이 짠했다. 그런 아들에게 애를 다시 데려가라는 말은 떠올릴 수조차 없는 말이었다. 그래.. 육 남매도 키웠는데.. 애 키우는 게 뭐 별일인가 싶었다.


일 년도 아니고 고작 몇 달 내 새끼가 좀 편해질 수 있다는데 못 해줄 일은 아니었다. 원하면 더 오래 봐주겠노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헌데 막상 현실을 맞이하니 생각한 것보다 많은 난관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키울 때의 아이들과 요즘 아이들은 같은 애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예상치 못한 전제의 오류였다. 아들 말마따나 요즘 애들은 다른 것 같았다. 그때보다 훨씬 똘똘했고 말도 참 잘했다. 가끔은 아예 무슨 소린지 모르는 말도 많이 했다.


“용이 삼촌. 근디 혹시 도마도.. 뭐드라..첩? 쳅? 뭐라든디..”


“도마도요? 지금 도마도는 안 달리는디?”


용이 아재는 마당 한 켠 텃밭에 심겨 있는 토마토 나무를 쳐다보았다.


“아니, 기냥 도마도가 아니라.. 뭐라드라.. 첩.. 뭐 그러던디...”


“누가여? 애기가여?”


“이, 내가 후라이랑 소시지를 부쳐 주니께 그 도마도..그걸 찾드라고..”


수수께끼 문제라도 맞히려는 듯 용이 아재는 할머니가 던진 단서들을 입으로 되뇌어 보았다.


“아- 케첩 찾나 부네. 도마토 케첩”


그리곤 역시 젊은 사람답게 그 답을 찾아냈다.


“이 맞어, 그 케..그거. 아유 확실히 젊은 사람이라 다르긴 다르구먼-”


할머니는 용이 아재가 무척 믿음이 갔다. 이런 어려운 것도 말 몇 마디에 금방 알아채다니, 역시는 역시였다. 


“즈이 집에 아마 있을 걸유. 설에 형네 애들이 찾아서 즈이두 사다 놨는디, 갸들 가고 나서 고대로 남았슈”


할머니는 용이 아재에게 부탁 한 건 잘한 일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요즘 애들을 키우려면 알아야 할 게 많은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이 동네에서 최고로 젊은 용이 삼촌은 할머니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의 특명을 받은 용이 아재는, 다음날 산에서 나무를 줍고 일부러 할머니네 냇가 쪽으로 가는 길을 택했고, 그러다 물고기와 한판 하고 있던 유나를 만났다. 그날 유나는 용이 아재를 귀신 아니, 마치 신을 보듯 넋을 잃고 쳐다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이 아재는 어려서부터 곤졸의 유명한 물고기 잡기 선수였다. 오랜만에 해보는 송사리잡이였지만 막상 유나와 놀아주다 보니 어릴 적 생각도 나고, 용이 아재는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물고기 잡기를 하고 말았다. 그 깜찍한 꼬마가 잡은 걸 죄다 쏟아버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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