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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이 모두 불을 밝히고 있어 여름밤의 공원은 옅은 수묵화 정도로 어두웠다. 은주는 오늘도 공원으로 향했다. 믿기지 않았던 첫 통화 이후 한동안은 일부러 사람이 드문 시간을 택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녀가 무얼 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이 대담한 시도를 할 때는 세상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타인은 타인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관심 같지 않았다.
요즘 은주는 개미 떼의 일원으로 공원을 돌다 당당하게 대세에서 벗어나 부스로 이어지는 샛길로 향한다. 처음이 어려웠지 이제 그녀도 베테랑 연기자처럼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부스로 향하던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귀에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착용하고 있고 그들 모두의 손에는 빠짐없이 핸드폰이 들려있다. 모두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와 영상을 듣고 보기에도 바쁘고, 늘 그랬던 것처럼 같은 자리를 뱅뱅 도는 유산소 운동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희미한 불빛조차 들어오지 않은 공중전화부스는 오늘도 여전히 외롭고 늙어 보였다.
여보세요오- 우리 복실이 또 전화했네-
은주는 이미 반백이 넘었건만 아빠는 그녀를 여전히 어릴 적 별명으로 부른다.
우리 집 복실이를 진짜 한번 데려와야 하는데.
은주는 볼멘소리로 말한다.
너 닮았겠지 뭐.
아빠가 큭큭 웃는다.
너 간난쟁일 때 옆집 복실이랑 똑같었다니까. 머리를 산발을 해서 꼬불꼬불….
옆집 강아지를 닮아 붙여진 그녀의 별명을 지금은 그녀가 키우는 반려견에게 넘겨주었다.
그나저나 아부지 마나님은 또 넘어지셨어. 그저께 또 화장실에서.
아이고. 며칠 왜 조용한가 했더니. 부러졌어? 못 걸어?
그 정돈 아닌데 여기까진 못 오셔. 며칠 기다리셔.
여 올 때 성한 다리로 와야 되는데, 조심 좀 하라 그래.
지난주에도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은주는 이때다 싶어 엄마 흉을 늘어놓는다. 아빠에게는 못할 얘기가 없다. 평소 남한테 안 하는 엄마 흉, 남편 흉, 아들 흉이 신기하게도 수화기만 들면 술술 나온다. 엄마랑 남편이랑 아들이랑 나누기 힘든 수다를 아빠와는 실컷 떨게 된다. 덕분인지 공중전화를 사용한 후로는 밤에 잘도 잘 온다.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건 아빠 앞에서는 어릴 적 애처럼 굴어도 된다는 점이다. 솔직히 느는 건 나이를 가리키는 숫자와 배 둘레 지방뿐이고 피부 탄력이나 기억력은 기하급수로 줄고 있건만, 어딜 가나 중년 소리를 듣는 나이라 어딜 가나 어른스러운 척을 해야 해서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아빠 앞에서는 만날 그대로여서 좋다. 어리든 중년이든 아빠의 딸이라는 것. 그러므로 나이와 상관없이 철부지 딸처럼 굴 수 있다는 것. 간난쟁이 시절의 은주나 반백이 된 지금이나 아빠 앞에서 그녀는 항상 같은 대상이라는 게 좋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아주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똑같은 아빠 딸이라는 사실에 한 번씩 놀라곤 한다.
부스 유리 밖으로 대세의 흐름에서 이탈해 샛길로 들어서는 한 사람이 보인다. 한두 번 이곳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이다. 좀 더 수다를 떨고 싶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수화기를 넘겨야 할 시간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또 전화할게. 잘 있으셔.
작작 좀 해라. 나도 여기서 할 일 많어.
아빠의 투정에 피식 웃으며 은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스에서 나온다. 안면 있는 그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다시금 대세의 대열에 합류한다. 저이는 어떻게 소문을 믿게 됐을까 궁금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는다.
그대 떠난 여기 노을 진 산마루터에~~
은주는 저도 모르게 x 세대 시절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요즘 그녀는 이렇게 자주 노래를 흥얼거리고 산들바람에 실려 다니듯 걸음이 가볍다.
비용도 필요 없고 간절한 그리움이면 제한시간 없이 통화 가능한 그것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친다.
혹시 모르고 지나쳤던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가? 아마 그것일 것이다. 이미 당신에게도 필요하거나, 언젠가 당신에게 필요할 그런 공중전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