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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프씨 Sep 25. 2024

신종 바이러스

(1)

그날은 아침부터 날이 궂었다. 


공동현관을 나선 후 산발적으로 비를 뿌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했지만, 그 순간의 시야에 빗줄기가 없었으므로 다시 우산을 챙기러 집에 가지는 않았다. 


그날 수업은 세 시간짜리 전공 수업뿐이었다. 이번 학기 수강 신청은 망했다. 3학년이고 게다가 복학생쯤 되니 수강 신청에 애쓰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부지런까지 떨게 만드는 배려 없는 학교 행정이 신입생 때부터 불만이었다. 학점 낮은 교양이었거나 비가 쏟아졌다면 아예 집을 나서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필 학점 높은 전공이었고, 하필 비도 내리지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버스에 올라탄 거였다.     


대중교통인 버스는 왜 이렇게나 대중에게 배려가 없을까. 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자동 재생되는 질문이었다. 손님이 카드를 찍고 원하는 곳에 착석 후, 혹은 적당한 위치에 서서 손잡이를 잡은 다음 버스가 출발하는 일은 그다지도 일어나기 힘든 일인 걸까. 그건 버스 기사의 인성 문제일까 버스 회사의 배차 시스템 탓일까. 수강 신청과 대중교통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두 단어에서 배려 없음이라는 공통점을 찾은 건 신기하지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평일의 버스 안은 한산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지만 자리를 고를 틈도 없이 출발하는 움직임에 나는 풀썩 아무 빈자리에나 앉 혀 졌 다. 

내가 고른 게 아닌 그 자리는 내리는 문과 마주하는 위치였다. 버스가 그렇게 급히 출발하지 않았다면 아마 뒤쪽으로 더 이동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나 자리를 옮기는 번거로움은 택하지 않았다.      


백 팩을 풀어 가슴 앞으로 안고 팔을 얹어 핸드폰을 두 손에 쥐었다. 아까, 그러니까 집을 나올 때부터 귀를 막고 있는 이어폰에서는 다른 나라 언어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볼륨 버튼을 눌러 한 칸만큼 소리를 크게 했다.

앞자리의 어르신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스스로 뒤돌아볼 정도의 외모가 아니라는 거 정도는 알고 있으므로 이어폰 소리가 컸나 보다 생각했지만, 나는 볼륨을 줄이지 않았다. 이렇게 일분일초라도 아껴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피곤한 학생의 일상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멈췄고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르는 할머니가 보였다. 아직 빈자리가 많다는 걸 알기에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리스닝에 더욱 신경을 집중했다. 배려 없는 버스는 역시 할머니가 자리에 다다르기 전에 출발했고 할머니는 코앞까지 아슬아슬하게 떠밀려와 손잡이를 붙들고서야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앞자리 어르신이 또 뒤를 돌아봤다. 이번에는 옆에 선 할머니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시선은 돌릴 수 있었지만 좌우 180도 상하 120도의 시야각 속 어르신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르신의 시선은 이렇게 꾸짖는 것 같았다.

여긴 어른들 전용석이야. 

젊은것이 왜 여기 앉았어. 

나는 슬그머니 소리를 한 칸 더 높였다. 지금 내가 얼마나 난해한 영어문장을 듣고 있는 건지 버스 안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또 생각했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할머니가 뒤쪽 손잡이를 이어 잡으며 이동하는데 마침 뒷자리 사람이 일어나 하차 벨을 누르고 출입문 앞에 섰다. 할머니는 바로 뒷자리에 착석했다. 

꼿꼿하게 앉아 스스로 '얼음'을 택하고 있던 내게 그 사실은 '땡'의 의미 같았지만 나는 자유롭게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 아까부터 아예 뒤 돌아앉은 자세인 앞자리 어르신이 나를 사이에 두고 뒷자리 할머니와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취급은 조금 기분 나쁘기도 또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다행인 건 최첨단 음 소거 기능 덕에 나의 고막에 다른 소리들은 다 소거된다는 점이었다. 

탁월한 기술력에 새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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